도예가 된 '고종 황제 증손녀'의 슬픈 가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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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네 분은 되실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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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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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08/05/17 [1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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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공주의 속은 까맣게 탔고 공주의 손은 흙을 쥐었습니다
도예가 데뷔한 '고종 황제의 증손녀' 이진씨 '슬픈 가족사' 털어놓다
신정선 기자 violet@chosun.com 입력 : 2008.05.16 14:17 / 수정 : 2008.05.17 15:20
-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힌 말. "체통을 지켜라" 나의 증조부는 고종 나의 조부는 의친왕 나의 아버지는 '비둘기집'의 가수 이석 그리고 네분의 어머니들… 표현못한 원망은 속에서 삭혀져 예술로 토해지고 "우리집에 환쟁이는 안돼" 아버지도 이젠 미소 내 작품 낙서입힌 도자기처럼 과거를 품고 미래로 가리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 길 중턱 '주(ju) 갤러리'에 들어서자 새(鳥)의 세계가 펼쳐졌다.
머리가 뻥 뚫린 큰 새 주변에 작은 새 194마리가 앉아 있었다.
흙으로 새를 만든 도예가가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그 모습 어디에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증손녀(曾孫女) 같은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주 갤러리 1층 입구에는 대형 화환이 놓여있었다. '축(祝) 전시, 황실 문화재단 총재 이석(李錫)'.
이석은 고종 황제의 5남 의친왕(義親王)의 11번째 아들이다.
세상은 그를 1970년대 초반 히트곡 '비둘기집'의 가수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금 전북 전주의 한옥마을 승광재(承光齋)에 살고 있다.
기자와 마주앉은 이진(李溱·32)은 이석의 1남2녀 중 둘째 딸이다. 족보를 따지면 고종 황제의 증손녀다.
"제 자아를 새(鳥)로 표현했어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환하게 트인 머리와 가슴으로 비상하는
자유로움을 나타내고 싶었어요."
- 신인임에도 언론은 그의 개인전에 주목했다. 한결같이 '고종 황제의 증손녀 도예작가 데뷔'라는 제목을 단 기사들이다. 그 기사들의 공통점은 또 있었다. "이씨에게 가족사(家族史)를 물어봤지만 그는 밝히기를 매우 꺼렸다"는 대목이다.
―왜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작품보다 집안일이 부각되는 게 싫어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체통 지켜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어딜 가도 '넌 누구니까'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강조한 것이지만 제겐 강요였어요."
―그런데 왜 프로필 맨 윗줄에 '고종 황제 증손녀'라고 적었나요?
"결국 알려질 거니까 아예 밝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황제의 증손녀인 게 싫은가요?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 뿌리를 버릴 수 없겠죠.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자 굴레라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가 부각된 것은 황실(皇室) 후손이라는 사실의 덕을 본 것 아닌가요?
"그런가요? 도자기에 그래피티(graffiti·낙서·落書) 기법을 도입한 제 작품이 새로운 거지만 그것만으로 주목받기는 힘들었겠죠. 먼 훗날 황실의 증손녀라기보다 '도예가 이진'으로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고 보지만요."
―도예가가 되려는 것을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처음엔 반대했죠. 언니(이홍·李泓·37·연예인)가 한성대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집안에 환쟁이를 둘이나 둘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무엇을 하라고 하셨나요?
"외교관이 되기를 원하셨죠. 아버지(외대 서반아어과 졸)도 외교관이 되려고 공부를 하신 적이 있거든요. 전 그쪽은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도자기를 하겠다니 '전승 도자기냐'고 물으시더군요. 아니라고 하니 많이 걱정하셨지만 이번 전시회에 와 '열정이 느껴진다'고 흐뭇해하셨어요.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글자가 든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이진은 아버지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니는 첫째 부인에게서, 현재 컴퓨터를 공부하고 있다는 남동생(29)은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씨의 모친은 그가 세 살 때 이혼했다. 미국 la에서 아버지와 다른 어머니와 2년간 살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진은 이모할머니와 살다, 귀국한 아버지·또 다른 어머니·남동생과 살기도 했다.
―어머니가 몇 분입니까?
"네 분은 되실 거 같아요. (웃으며) 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봐서 그럴 거예요. 전 금세 잊고 포기도 빨라요. 확 덮고 다른 걸로 진행해요. 훈련이 된 거 같아요."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은 없나요?
"울컥한 적도 있었지만… 겉으론 표현하지 못했어요. 속으로 삭였죠. 그런 에너지가 지금 예술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나요?
"외국에 계셔요. (아버지와) 이혼하고 나서도 8년 정도 아버지를 기다리시다 재혼하셨어요. 재혼한 분은 지금 돌아가셨고 다시 혼자 사세요."
- 황제의 증손녀는 la 알링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마포 신수중학교, 선일여고에 진학했다. '미션스쿨'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한국 삼육고에 전학(轉學) 서류를 냈다. 아버지에게 그는 전학 지원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안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왜 학교를 옮길 생각을 했나요?
"하나님에 빠져있었거든요. 서류 접수 사실을 말씀드리고,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어요. '어떻게 전학을 네 멋대로 하느냐'고 펄펄 뛰셨죠."
―대학은 왜 사회복지학과(삼육대)를 택했나요?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요. 1998년에는 워킹 할리데이에 참가해서 1년간 호주에서 살았어요. 제가 학비와 여행비를 벌 수 있어서 좋았어요."
―황실의 증손녀도 돈을 법니까?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어요. 아버지도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대학교 때부터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학비를 벌어서 충당했어요. 용돈을 받아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무슨 아르바이트를 했나요?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렸어요. 시간당 3000원쯤 받았을 거예요. 한복 모델도 해봤어요. 대기업 사내방송 아나운서도 6개월간 했어요. (기자의 녹음기를 보더니) 이런 보이스 레코더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어요."
이씨는 2002년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현재 휴학 중이다. 도예에 빠지면서 2004년 뒤늦게 입학한 경희대 학부 도예학과는 올해 졸업했다. 터키 여행 중 처음 접한 도자기에 빠져들면서 결정한 인생 행로의 수정(修正)이었다.
그는 "대학교 때 유럽여행을 하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왕에게 헌납할 접시를 만드는 장인들을 만났다"며 "그들의 작업실에서 차갑지만 따뜻하고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흙'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전시회 주제가 '흙, 에너지, 그래피티 그리고 소통'인데, 무엇을 나타내고 싶었던 건가요?
"흙이 가진 원초적인 에너지와 열정을 도자기에 담고 싶었어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해요. 저를 받아줄 만한 것은 흙밖에 없는 거 같아요. 만드는 과정에서 흙만큼 기쁨을 준 것이 없었어요."
―그래피티는 어떤 의미에서 도입했나요?
"제 작품에서는 에너지를 분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채택했어요. 도자기라는 고유의 형태에 새로운 에너지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이씨는 무형문화재 호봉(瑚峰) 장송모(張松模) 선생의 제자다. 아버지가 아는 분을 통해 처음 만난 뒤 2006년부터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도 강원도 횡성군의 가마를 오가며 지도를 받는다. 장씨는 이씨의 작품을 두고 "표현하려는 열정이 넘쳐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이씨의 작품은 50여 점이다. 작품당 가격은 50만~200만원 정도. 전시회에는 8개의 도자기판이 하나의 주제를 이룬 특별한 작품이 있다. 이씨가 고모할머니 덕혜옹주(德惠翁主)를 위해 만든 작품이다.
"고모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딱 한 번 뵌 적이 있어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때였는데 저를 보시더니 '예쁘다'고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이번 작품을 만드는 데 할머니가 어떤 영향을 줬나요?
"할머니가 얼마나 한국을 그리워했는지,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는지를 알고 나서 그 마음을 제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게 어떤 작품인가요?
"어느 신문기사에서 읽었는데, 할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대한민국 우리나라'라고 하셨대요. 그 기억이 나 여덟 글자를 하나씩 그려 넣은 도자기 타일 작품을 만들었어요. 이 작품 판매금은 고통받는 여성들을 돕는 데 쓰고 싶어요. '여성 쉼터' 등 여성 단체에 기부할 예정입니다. 할머니도 기뻐하시리라 믿어요."
―언니 이홍씨는 경복궁을 지나갈 때 눈물이 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진씨도 고궁을 보면 특별한 감회를 느끼나요?
"(손을 크게 저으며) 노노노~~~. 저는 아니에요. 언니는 가족사를 많이 부각시키는 편이지만 저는 가능하면 숨기려는 쪽이죠."
―언니와 많이 다르군요.
"사실 언니와 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요. 언니하고 같이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만난 것도 몇 번 안 돼요."
―왜 그런가요?
"언니가 연예계 데뷔할 때 '황손의 외동딸' '마지막 공주'라고 홍보해서 집안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가족 사항은 집안 전체가 포함되는 문제인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예요. 그때 크게 싸웠죠. 그 후로 연락 안 하고 지내요. 이번 전시회에도 초대 안 했어요."
한때 tv 드라마 '궁(宮)'이 인기를 끌면서 황실 복원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에 대해 황제의 증손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나라가 바뀌고 사회 시스템이 바뀌었는데, 무조건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무리예요. 단, 황실의 전통을 문화예술적 측면에서 살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황실 문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황실 문화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조상들이 만들어온 문화의 보고(寶庫)니까요. 당대 최고의 것들은 황실 문화에 있었어요. 황실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공예대전의 운영위원도 그런 취지에서 맡고 있어요."
―황실 복원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이야기한 적은 없었나요?
"많이 다퉜어요. 아버지께서는 전통과 형식을 강조하시니까,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한 세대 더 떨어진 제가 느끼기에는 버거운 부분이죠."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황실의 후손이라도 대중 안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아버지와 상충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현대인이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죠. 과거사에서 조금 더 자유롭고 싶고요."
그는 올해 안에 두 번째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야외 공원에서 더 대중친화적으로 작품을 선보이겠다는 구상도 이미 서있다. "시사적이고 사회적인 건 아직 두려워요. 흙에서 제가 발견한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이씨는 내년에 미국으로 mba 공부를 하러 떠날 예정이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는 도자기를 굽는 것 못지않게 경영학 공부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목표는 하버드대. 입학허가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이미 그쪽과 컨택(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가족사를 담은 책을 내기 위해 자료도 모으고 있다. 외국에서 영어로 먼저 낸 후에, 한국어판을 낼 예정이다.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마지막 황족의 후손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아서 낼 거예요. 자료를 모으고 집필하려면 몇 년 걸리겠죠. 옛날 것을 담으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제 숙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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