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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에서 노래자랑 이라니, 1인시위라도 하겠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과 舊황실 이야기
 
김기백.황호기자 기사입력 :  2008/05/1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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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랏상을 시중드는 궁녀들 

 
 
지난주 금요일 안국 전철역 바로 옆에 있는 운현궁에서는 조선왕조의 역대왕들이 드시던 수랏상을 재현하는 문화행사가 있었고, 그행사에서 임금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70년대에 '비둘기집' 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황손가수 이석 公' 이었다. 
 
 
▲      왼쪽 가수 심수경 오른쪽 이석 公 편집부


 
민신발행인은 평소 이석公과 별다른 연고나 안면이 없었으나, 얼마전 백범기념관에서 개최된 '숭례문 복원 운동 발대식' 행사에서 민신발행인이 직접쓴 선언문을 낭독한자리에 이석公 도 참석한것이 계기가 되어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고, 그무렵 "독도는 우리땅" 작곡가 박문영씨의 소개로 알게된  아! 숭례문~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심수경양에게 연락하여, 박문영.심수경등 몇명의 지인들과 함께 운현궁 행사에 참석하여  이석公의 역사강좌도 들을수 있었고 그와 별도로 짧게나마 인터뷰 형식의 대담을 나눌수 있었다.
 
 

▲     © 외국인 관광객 들과...


 
 그자리에서 이미 칠십객이 된 李公이 개탄과 분개를 썩어서 지적하기를 "요새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조차   태.정.태.세. 문.단.세... 조차 외울줄 모를 정도로 우리시대와 가장 가까운 조선왕조 역사를 거의 모르고 있을만큼 역사의식이 너무 희박하고, 정부나 민간인 할것없이 문화재를 소중히 여길줄 모르는 세태 때문에 바로 숭례문 전소라는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발생한것이며, 불과 몇달사이에 벌써부터 국민들 뇌리에 '숭례문 대참사사건'이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지 않느냐 면서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  숭례문을 보고 대성통곡 했다는 이석 公



李公이 한층더 분노와 분개를 금치못하는것은 "공영방송인 kbs 주체로 무슨 문화행사를 한답시고  고궁에서 무슨 노래자랑 대회를 열겠다고 태연자약하게 광고까지 하고 있다" "다른나라 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일" 이라고 심각한 우려와 함께 " 나혼자 1인시위라도 해서 온몸으로 막겠다"고 까지 하면서 개탄과 분노를 표하더라는 것이다.
 
민족신문 발행인이 이기사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것은, 마지막 황태자영친왕의이복형이자,이석公의 生父이신 의친왕 李綱 殿下는 유약한 성품이었던 순종황제나 영친왕과는 달리祖父이신 흥선대원군을 연상시킬만큼 , 성품이 매우 호방하고 기개와 자질이 특출했던 왕자로 11세때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보다 보다 무려 20년 연장자였으나, 의친왕의 그러한 자질을 매우 못마땅해하던 일제의 작용에 의해 황태자 책봉에서 밀려난것이며, 기미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1919년)의친왕이 일단의 독립투사들과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 국경을 넘기 직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나, 만약 그때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항일독립투쟁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의친왕의 아들 이우 왕자


 
또하나는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기 직전이던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 그날  승용차를 마다하고 말을 타고 출근하다가 희생당한  이우공(얼마전 얼짱왕자로  네티즌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던)이 바로 의친왕의 아들이자 이석공의 형님되시는 분으로 아직도 유골이 환국하지 못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인들에 의해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     ©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



아래의 기사는 그날 사진을 찍고 대화내용을 정리한 황호기자가 별도로 자료를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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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왕자 한 사람이 책과 세탁물 그리고 전자 렌지로 가득한 2인용 밴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한 때 주한 미군을 상대로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는 값싼 여인숙에서 잠을 잔다.

이제 이석(70)씨는 실각한 이씨 왕가의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1인 운동을 시작했다. 이씨 왕가는 일본이 1910년 식민지로 지배하기 전까지 518년 간 한반도를 지배했었다.
이씨는 ``내가 죽으면 마지막 왕가에 대해 이야기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     © 정장 차림의 젊은 의친왕


한국은 조선시대 한글 창제 등 역사 유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옛 왕실에서의 사랑과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에 관한 사극은 tv의 주요 프로그램이다. 관광객들은 서울의 각 왕궁에서 수문장 교대식과 궁정음악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조선 왕조 마지막 왕족들의 이름이나 소재에 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인들은 조선의 마지막 통치자들이 무능했다고 비난하면서 35년에 걸친 치욕적인 일본에의 예속을 그들의 탓으로 돌린다.
이석씨는 ``그런 비난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모든 업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왕족은최소한 지금보다는  좀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비록 일부 핵심 지지자들은 한국이 군주국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씨는 그런 요구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신 정부가 ``최소한 관광객 유치를 위한 방안으로라도’’ 자신을 왕궁에서 살도록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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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국민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들어 이석씨는 또한 일반인들이 궁중 의상, 음식, 예법에 관해 배울 수 있는 박물관 건립을 바라고 있다.
4년 전 그는 주로 자신의 밴으로 운영하는 조직인 황실 보전 국민연합회를 설립했다. 그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최소 월 1,000원 (83센트)의 회비 납입을 요청 받은 수천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한 회원은 최근 ``전하, 저는 항상 전하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살아계신 것을 알게 돼 저는 행복의 눈물로 넘쳐납니다’’라고 썼다.
이씨는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전화한다’’면서 ``일전에 80세의 한 노인은 저에게 단지 절을 하기 위해 상경하겠다고 전화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씨의 운동을 알지 못하고 있다.


택시 기사인 김재춘씨는 ``조선 마지막 왕과 왕족에 대해 동정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면서 ``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지 이해합니다. 그것은 당혹스런 역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젊잖치만 위엄있는 어투로 말한다. 그는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기 전 깨끗하게 다림질한 양복을 입고 머리를 빗는다.


조선왕조는 강대국들이 한국을 지배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이석씨의 조부 즉 고종 황제 재위 중 쇠락했다. 조정의 적대적인 당파는 각각 중국과 러시아 및 일본 세력에 달라 붙었으며 이 같은 복잡한 계략은 일본군에 의한 왕비의 시해로 이어졌다.

고종 황제는 수 십 명의 손자 손녀가 있었다. 그 중 이석씨가 한국에 살고 있는 유일한 손자다. 그의 형들은 모두 죽었다. 남동생 둘은 미국에서 자동차 수리 센터와 주류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는 또한 미국에 둘, 한국에 세 명의 자매가 있다.
 
▲   고종.순종황제와 의친왕 과 가족들... 맨왼쪽 칼을 짚고있는분이 의친왕. 중앙의 고종황제 바로 뒤 군복차림의 어린소년이 영친왕이고 맨 오른족 소녀가 덕혜옹주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여인과 강제로 결혼한 이석씨 숙부의 74세된 아들 한 분이 일본에 살고 있다. 일부 왕실 친족들은 그를 왕위 서열의 일순위로 여기고 있으나, 일본인 어머니한테서 태어났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끼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1948년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석씨 가족을 서울의 한 궁궐에서 살도록 했으나 방대한 왕실의 재산은 몰수했다. 그는 왕족을 자신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보았다.

``여전히 도처에 나를 따르는 궁녀들이 있었어요’’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이씨는 ``그들은 나에게 왕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거라며 뛰어다니지 말라고 간청하곤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왕실 관행에 따라 그의 어머니는 이석씨를 ``전하’’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이씨는 말한다.

1960년대 군부 통치자들이 이씨 가족으로부터 연금(年金)을 박탈하자, 그는 디스크 자키로 일했다. 1962년 ``샌프란시스코에 내 마음을 남겨 놓고’’ 등의 노래로 주한 미군을 위해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한국 내 모든 미군기지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앤디 윌리암스와 팻분 스타일을 섞어 놓은 가수였지요’’라고 밝힌 그는 ``한 숙모님이 이를 알고 조선의 왕자가 `광대’가 되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셨지만, 저는 생계를 꾸려야만 했습니다’’고 덧붙인다.

이석씨는 행복한 가정을 노래한 아름다운 선율의 히트곡 ``비둘기 집’’으로 1970년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전두환 육군소장이 197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이씨 가족을 궁궐에서 쫓아내자 할 수 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     © 양복차림의 고종황제



이씨는 비자 유효기간이 만료돼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잔디를 깎거나, 수영장을 청소하고 주류가게에서 무장경비로 일했다. 영주권 취득 후 그는 자신의 주류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1989년 고국에 돌아왔다.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옛집인 왕궁에 갔어요. 하지만 그 곳 경비원들은 나를 들여 보내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자기 위해 밤에 담을 뛰어 넘었습니다만 왕궁은 난방이 안돼 너무 눅눅했습니다’’라고 이씨는 밝힌다.


이씨는 짧았던 결혼을 세 번 했다. 그는 각자 어머니가 다른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다.
최근 호의적인 한 건물주가 이석씨에게 임시로 작은 사무실 하나를 사용하도록 해 주었다. 열어젖혀진 상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아래층에는 나이트 클럽 ``돈텔마마’’로부터 음악소리가 쿵쿵거린다. 한쪽 벽에는 ``대한 왕실 재건하자!’’라는 구호가 들어있는 액자가 걸려 있다.

편집자주: 진작에 기사화 했어야 했으나, 민신발행인과 황호기자 둘다 사진편집이 매우 서툰데다가 아런저런 잡다한 바쁜일들 때문에 기사화가 대단히 늦어진점 이석公과 심수경양을 비롯한 그날 참석자 여러분은 물론, 민신독자들과 네티즌 여러분에게도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다는 유감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http://www.minjokc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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