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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파리 지키려 뉴욕 포기할 것인가” "서울 지키려 LA 포기할것인가
핵의 세계는 ‘회색지대’ 인정 안해 ...북한 핵무기에 대항 아니면 순종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7/09/2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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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프랑스는 핵무장을 단행할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드골의 독자적인 핵전략
드골은 장엄하다. 그의 언어는 묵시(黙示)론적 색채로 드러난다. “위대(grandeur)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 구절은 소명의식을 주입한다. 그는 역사 앞으로 돌진했다.
 

"핵무장이 주권국가 안보의 선봉”
드골, 핵을 ‘신의 한 수’로 활용해
국가 지위 향상, 독자 외교 강화

미국의 핵우산에 드골 불신
"파리 지키려 뉴욕 포기할 것인가”
그 의문은 2017년 한국에 유효
"서울 지키려 LA 포기할 것인가”

핵의 세계는 ‘회색지대’ 인정 안해
북한 핵무기에 대항 아니면 순종
 
 
20세기 프랑스에 시련이 닥쳤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파리를 점령했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디엔비엔푸 참패)에서 치욕을 당했다. 프랑스는 패배에 익숙해졌다. 1958년 드골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프랑스 영광’의 복원에 나섰다.
 
드골에게 ‘신(神)의 한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핵무장이다. 핵무기는 프랑스의 국가 위상을 높였다. 사회의 침체 분위기를 몰아냈다. 드골은 정치적 상상력과 영감(靈感)을 전파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드골의 전략에 주목했다. 핵무기는 자주국방의 도구다. 박정희의 핵 개발은 미국의 제동으로 좌절됐다. 그 40년 뒤 북한의 핵 야욕은 성취됐다.

콜롱베의 드골 기념관 조각상. 지팡이를 든 노년의 드골, 집념과 피로가 얽힌 표정에 그의 큰 키(1m96㎝) 높이다.

콜롱베의 드골 기념관 조각상. 지팡이를 든 노년의 드골, 집념과 피로가 얽힌 표정에 그의 큰 키(1m96㎝) 높이다.
  
 
나는 드골을 장기간 추적했다. 콜롱베 레 되 제글리즈(Colombey-les-Deux-Églises). 그 작은 시골에 드골의 집과 묘소, 기념관이 있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은 콜롱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곳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270여㎞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A5)를 타고 3시간쯤 달렸다. 오트마른(샹파뉴-아르덴 지방) 쪽이다. 낮은 언덕 위로 거대한 십자가가 보인다. 목적지에 다가갔다.
 
‘로렌의 십자가(Croix de Lorraine)’-. 저항과 수호의 상징이다. 십자가(높이 44.3m, 1972년 세움) 아래에서 노년의 프랑스 관광객 다섯이 국가를 부른다. ‘라 마르세예즈’는 호전적인 선동을 쏟아낸다. “전진! 전진! 저들의 불결한 피로, 우리의 들판을 적시자.” 그 장면은 드골의 격렬한 생애와 만나는 의식일 것이다. 
 
드골 기념관 앞에 있는 ‘로렌의 십자가’. 드골 장군이 런던 망명 시절에 이끈 ‘자유 프랑스 ’를 상징한다.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드골 기념관 앞에 있는 ‘로렌의 십자가’. 드골 장군이 런던 망명 시절에 이끈 ‘자유 프랑스 ’를 상징한다.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드골 기념관은 직사각형의 단순미를 뽐낸다. 십자가의 긴 세로 막대와 어울린다. 기념관 주제는 ‘인간 흔적, 프랑스 역사’. 전시실(1600㎡)은 사진(1000장), 지도, 비주얼 그래픽, 유품으로 꾸몄다. 프랑스의 예술적 감성은 생동감을 넣는다. 독일에 패전한 뒤 드골은 영국 런던으로 갔다. 그는 망명 조직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다. 그는 BBC방송 마이크 앞에 섰다. “우리는 전투(bataille)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전쟁(guerre)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드골은 항전의 투지를 퍼뜨렸다. 영국 총리 처칠은 그를 지원했다.
 
그는 프랑스 해방의 영웅이었다. 그는 잠시 정부(내각수반)를 맡았다. 하지만 낙담과 은퇴가 이어졌다. 1950년대 후반 소용돌이가 일었다. 식민지 알제리(북아프카) 독립문제 때문이었다. 4공화국 정부는 드골의 권력 복귀를 요청했다. 58년 6월, 나이 68세 때다. 다음 전시 문구는 ‘Je- vous ai compris(나는 당신들 뜻을 이해했다)’.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시사다. 군부는 반발했다. 군사 반란이 있었다. 드골은 권위로 평정했다. 대통령 책임제의 5공화국이 출발했다. 
 
1966년 9월 프랑스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산호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드골 대통령이 순양함 ‘드 그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9월 프랑스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산호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드골 대통령이 순양함 ‘드 그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그때는 미국·소련의 냉전 대결 시대였다. 그 무대에서 프랑스는 2류 조연급이었다. 드골은 신의 한 수를 다듬었다. 그의 권력 귀환 전인 1957년 10월, 소련은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 위성을 쏘았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그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등장을 예고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은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미국이 소련의 핵 보복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나라를 위해 핵 공격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은 대안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이다.
 
전시실의 핵무장 부분은 결단의 역정 속에 존재한다. ‘force de frappe(타격능력)’라는 어휘가 눈길을 끈다. 핵무장 논리다. 나는 들고 있던 드골의 연설 책자를 펼쳤다. “프랑스 방어는 프랑스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 우리 프랑스는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할 수 있는 ‘타격능력’이 필요하다. ···군사력의 기본은 핵무장이다. 우리는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이다.
 
그는 장교 시절 기갑부대의 공세적 전략을 역설했다. 전시실에 탱크 지휘관 차림의 드골(생시르 육사 졸업) 사진이 있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방어적 전략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지노 지하 요새의 구축이다.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은 요새를 우회했다. 벨기에 쪽으로 전격전 목표를 바꿨다. 마지노의
수비적 개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핵무기는 공세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 심리는 상황의 주도권을 생산한다. 드골은 “군사력은 주권국가의 조건이다. 핵무장이 군사력의 선봉(fer de lance)”이라고 했다. 1960년 2월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 프랑스의 1차 핵실험은 성공했다. 그는 확언했다. “프랑스는 더욱 강해지고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프랑스는 핵무기 클럽에 진입했다. 드골의 야망은 실현됐다.
 
1958년 6월 권력에 복귀한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알제리를 방문했다. [중앙포토]

1958년 6월 권력에 복귀한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알제리를 방문했다. [중앙포토]


  미국은 드골을 견제·비판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에 이어 케네디를 만났다. 전시실에 정상회담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미국 대통령들은 독자적 핵전략의 포기를 요구했다. 드골은 거부했다. 그는 미국의 핵 지원 약속에 의문을 표시했다. 드골의 거부와 의문은 언론 문법으로 이렇게 정리됐다. “(소련의 핵 협박을 무릅쓰고도) 미국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 의문은 2017년 가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된다. “(북한의 핵 협박을 무릅쓰고도) 미국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LA를 포기할 수 있는가.”
 
드골은 핵무기를 마법의 정책수단으로 다듬었다. 핵은 국제정치의 판도를 바꿨다. 드골은 독자 외교의 기반을 확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가 이어졌다. 핵은 첨단산업의 자극제였다.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원전 건설이다. 프랑스 군부는 결연했다. “당면 문제는 핵무기냐, 재래식 무기냐의 선택이 아니다. 핵무기를 보유하든지, 아니면 안보 자체를 포기하느냐의 양자택일이다.” 칼 없는 정의(正義)는 조롱당한다. 그 같은 자세도 지금의 한국 상황에 유효하다.
 
북한 핵 위협의 대응방식은 두 가지다. 어떤 형태든 핵으로 맞서든지, 아니면 김정은의 자선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항이냐 순종이냐의 선택이다. 협상해결론의 공간은 옹색하다. 핵의 세계는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드골의 핵 프로그램은 확장됐다. 1966년 9월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69년 드골은 퇴장했다. 드골은 독보적인 역사를 썼다. 그 서사시에서 핵무기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평범한 무덤, 이름뿐인 묘비명 … ‘내가 곧 역사’라는 자존심 담겨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드골의 독자적인 핵전략
드골은 장엄하다. 그의 언어는 묵시(黙示)론적 색채로 드러난다. “위대(grandeur)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 구절은 소명의식을 주입한다. 그는 역사 앞으로 돌진했다.
 

"핵무장이 주권국가 안보의 선봉”
드골, 핵을 ‘신의 한 수’로 활용해
국가 지위 향상, 독자 외교 강화

미국의 핵우산에 드골 불신
"파리 지키려 뉴욕 포기할 것인가”
그 의문은 2017년 한국에 유효
"서울 지키려 LA 포기할 것인가”

핵의 세계는 ‘회색지대’ 인정 안해
북한 핵무기에 대항 아니면 순종
20세기 프랑스에 시련이 닥쳤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파리를 점령했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디엔비엔푸 참패)에서 치욕을 당했다. 프랑스는 패배에 익숙해졌다. 1958년 드골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프랑스 영광’의 복원에 나섰다.
 
드골에게 ‘신(神)의 한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핵무장이다. 핵무기는 프랑스의 국가 위상을 높였다. 사회의 침체 분위기를 몰아냈다. 드골은 정치적 상상력과 영감(靈感)을 전파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드골의 전략에 주목했다. 핵무기는 자주국방의 도구다. 박정희의 핵 개발은 미국의 제동으로 좌절됐다. 그 40년 뒤 북한의 핵 야욕은 성취됐다.
콜롱베의 드골 기념관 조각상. 지팡이를 든 노년의 드골, 집념과 피로가 얽힌 표정에 그의 큰 키(1m96㎝) 높이다.

콜롱베의 드골 기념관 조각상. 지팡이를 든 노년의 드골, 집념과 피로가 얽힌 표정에 그의 큰 키(1m96㎝) 높이다.
 
 
나는 드골을 장기간 추적했다. 콜롱베 레 되 제글리즈(Colombey-les-Deux-Églises). 그 작은 시골에 드골의 집과 묘소, 기념관이 있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은 콜롱베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곳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270여㎞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A5)를 타고 3시간쯤 달렸다. 오트마른(샹파뉴-아르덴 지방) 쪽이다. 낮은 언덕 위로 거대한 십자가가 보인다. 목적지에 다가갔다.
 
‘로렌의 십자가(Croix de Lorraine)’-. 저항과 수호의 상징이다. 십자가(높이 44.3m, 1972년 세움) 아래에서 노년의 프랑스 관광객 다섯이 국가를 부른다. ‘라 마르세예즈’는 호전적인 선동을 쏟아낸다. “전진! 전진! 저들의 불결한 피로, 우리의 들판을 적시자.” 그 장면은 드골의 격렬한 생애와 만나는 의식일 것이다.
 
드골 기념관 앞에 있는 ‘로렌의 십자가’. 드골 장군이 런던 망명 시절에 이끈 ‘자유 프랑스 ’를 상징한다.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드골 기념관 앞에 있는 ‘로렌의 십자가’. 드골 장군이 런던 망명 시절에 이끈 ‘자유 프랑스 ’를 상징한다. 그 옆은 박보균 대기자.
드골 기념관은 직사각형의 단순미를 뽐낸다. 십자가의 긴 세로 막대와 어울린다. 기념관 주제는 ‘인간 흔적, 프랑스 역사’. 전시실(1600㎡)은 사진(1000장), 지도, 비주얼 그래픽, 유품으로 꾸몄다. 프랑스의 예술적 감성은 생동감을 넣는다. 독일에 패전한 뒤 드골은 영국 런던으로 갔다. 그는 망명 조직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다. 그는 BBC방송 마이크 앞에 섰다. “우리는 전투(bataille)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전쟁(guerre)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드골은 항전의 투지를 퍼뜨렸다. 영국 총리 처칠은 그를 지원했다.
 
그는 프랑스 해방의 영웅이었다. 그는 잠시 정부(내각수반)를 맡았다. 하지만 낙담과 은퇴가 이어졌다. 1950년대 후반 소용돌이가 일었다. 식민지 알제리(북아프카) 독립문제 때문이었다. 4공화국 정부는 드골의 권력 복귀를 요청했다. 58년 6월, 나이 68세 때다. 다음 전시 문구는 ‘Je- vous ai compris(나는 당신들 뜻을 이해했다)’.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시사다. 군부는 반발했다. 군사 반란이 있었다. 드골은 권위로 평정했다. 대통령 책임제의 5공화국이 출발했다.
 
1966년 9월 프랑스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산호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드골 대통령이 순양함 ‘드 그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9월 프랑스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산호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드골 대통령이 순양함 ‘드 그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그때는 미국·소련의 냉전 대결 시대였다. 그 무대에서 프랑스는 2류 조연급이었다. 드골은 신의 한 수를 다듬었다. 그의 권력 귀환 전인 1957년 10월, 소련은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 위성을 쏘았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그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등장을 예고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은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미국이 소련의 핵 보복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나라를 위해 핵 공격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은 대안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 억제력 구축이다.
 
전시실의 핵무장 부분은 결단의 역정 속에 존재한다. ‘force de frappe(타격능력)’라는 어휘가 눈길을 끈다. 핵무장 논리다. 나는 들고 있던 드골의 연설 책자를 펼쳤다. “프랑스 방어는 프랑스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 우리 프랑스는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할 수 있는 ‘타격능력’이 필요하다. ···군사력의 기본은 핵무장이다. 우리는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이다.
 
그는 장교 시절 기갑부대의 공세적 전략을 역설했다. 전시실에 탱크 지휘관 차림의 드골(생시르 육사 졸업) 사진이 있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방어적 전략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지노 지하 요새의 구축이다.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은 요새를 우회했다. 벨기에 쪽으로 전격전 목표를 바꿨다. 마지노의 수비적 개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핵무기는 공세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 심리는 상황의 주도권을 생산한다. 드골은 “군사력은 주권국가의 조건이다. 핵무장이 군사력의 선봉(fer de lance)”이라고 했다. 1960년 2월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 프랑스의 1차 핵실험은 성공했다. 그는 확언했다. “프랑스는 더욱 강해지고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프랑스는 핵무기 클럽에 진입했다. 드골의 야망은 실현됐다.
 
1958년 6월 권력에 복귀한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알제리를 방문했다. [중앙포토]

1958년 6월 권력에 복귀한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알제리를 방문했다. [중앙포토]
미국은 드골을 견제·비판했다. 그는 아이젠하워에 이어 케네디를 만났다. 전시실에 정상회담 사진들이 진열돼 있다. 미국 대통령들은 독자적 핵전략의 포기를 요구했다. 드골은 거부했다. 그는 미국의 핵 지원 약속에 의문을 표시했다. 드골의 거부와 의문은 언론 문법으로 이렇게 정리됐다. “(소련의 핵 협박을 무릅쓰고도) 미국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 의문은 2017년 가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된다. “(북한의 핵 협박을 무릅쓰고도) 미국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LA를 포기할 수 있는가.”
 
드골은 핵무기를 마법의 정책수단으로 다듬었다. 핵은 국제정치의 판도를 바꿨다. 드골은 독자 외교의 기반을 확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가 이어졌다. 핵은 첨단산업의 자극제였다.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원전 건설이다. 프랑스 군부는 결연했다. “당면 문제는 핵무기냐, 재래식 무기냐의 선택이 아니다. 핵무기를 보유하든지, 아니면 안보 자체를 포기하느냐의 양자택일이다.” 칼 없는 정의(正義)는 조롱당한다. 그 같은 자세도 지금의 한국 상황에 유효하다.
 
북한 핵 위협의 대응방식은 두 가지다. 어떤 형태든 핵으로 맞서든지, 아니면 김정은의 자선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항이냐 순종이냐의 선택이다. 협상해결론의 공간은 옹색하다. 핵의 세계는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드골의 핵 프로그램은 확장됐다. 1966년 9월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69년 드골은 퇴장했다. 드골은 독보적인 역사를 썼다. 그 서사시에서 핵무기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평범한 무덤, 이름뿐인 묘비명 … ‘내가 곧 역사’라는 자존심 담겨
프랑스 시골 마을 콜롱베 성당의 공동묘지에 있는 드골의 흰 대리석 무덤과 수식어 없는 비석. 파리에서 270㎞ 떨어져 있다.

프랑스 시골 마을 콜롱베 성당의 공동묘지에 있는 드골의 흰 대리석 무덤과 수식어 없는 비석. 파리에서 270㎞ 떨어져 있다.
 
‘Charles de Gaulle, 1890~1970’-. 샤를 드골의 묘비명이다. 드골의 언어 구성은 단순과 직설이다. 그는 정치에서 말과 글의 힘을 알았다. 그는 자신만의 문체를 갖고 있었다. 그의 저서는 13권. 1969년 4월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집권 11년) 그의 익숙한 승부수가 먹히지 않았다. 국민투표에서 패배했다.
 
그 직후 드골은 말했다. “나는 공화국 대통령의 권한행사를 중단한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그는 상황을 압축했다. 선언적 어투다. 아쉬움과 유감을 담지 않았다. 그는 다음 단계로 대중의 상상력을 이동시켰다.
 
드골은 콜롱베로 떠났다. 콜롱베는 인구 700명의 시골. 그곳에 그의 사저, 라 브아서리(La Boisserie)가 있다. 숲과 정원 속 2층집(방 12개). 1층 서재에 케네디와 닉슨의
사진 액자가 보인다. 58년 9월 드골은 그 집으로 아데나워(당시 72세) 독일 총리를 초청했다. 드골은 이렇게 기억했다. “늙은 프랑스인과 더 늙은 독일인의 역사적 만남을 위해선 궁전의 장식보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적대에서 화해로.- 라 브아서리는 양국 관계의 새 출발점이다. 둘의 만남 50년뒤(2008년), 드골 기념관은 개관했다. 
 

권력 하야 뒤 드골의 일상은 글쓰기(『희망의 회고록』)였다. 70년 11월 9일 그는 집필 중 탁자 위로 쓰러졌다. 심장마비(80세). 그 탁자가 전시돼 있다. 그는 유언을 오래전에 써놓았다.
 
“국장(國葬) 거부, 무덤은 콜롱베 성당의 공동묘지, 딸(다운증후군으로 숨짐) 옆에, 언젠가 나를 따를 아내와 함께 묻힐 곳, 묘비명은 샤를 드골 1890~0000(사망년도), 간소한 의식, 프랑스 육군을 제외한 고위 인사의 참석 거절.” 
 

 

 



 
드골의 장례는 그렇게 진행됐다. 묘지는 흰 대리석과 십자가(1.5m)로 장식됐다. 성당 묘지들은 평범하고 비슷한 크기다. 드골은 그 자체로 역사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설정했다. 미사여구와 수식어의 존재이유는 없다. 그는 자존심과 오기를 거기에 투사했다. 나는 이름뿐인 묘비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극단적인 간결함. -그것은 드골의 언어처럼 절제의 정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잔해마저 역사에 남기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드골의 완벽주의 신화는 완성된다

 
[S BOX] ‘자칼의 날’과 시트로앵 DS

‘시련에 지친 늙은이.’ 드골이 노년에 자신을 빗댔다. 시련에는 군부 반란과 여러 차례 암살 위기도 있었다. 배경은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독립 허용. 군 일부가 거세게 반항했다. 비밀결사대(OAS)가 조직됐다. 목표는 군의 대선배 저격. 1962년 8월 22일 저녁 대통령의 모터케이드가 파리 외곽 오를리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시속 110㎞. 검은색 리무진(시트로앵 DS19·사진 ③ )에 드골은 부인(이본)과 타고 있었다. 극우파 OAS 대원 12명이 거리에서 기습했다. 자동소총 140발을 발사했다. 차의 뒷유리창이 깨졌다. 타이어는 터졌다. 차는 위험지대를 벗어났다. (타이어가 펑크나도 달릴 수 있게 개조) 드골 부부는 무사했다

 

  그는 여유를 보였다. “(저격범들이) 돼지처럼 쏘아댔다.” 그 사건은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의 소재다. 드골은 시트로앵 DS의 행운에 애착을 가졌다. DS 외모는 이름(여신 Deesse)대로 고혹적이다. 그 차는 드골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사건 후에도 드골은 DS 천장 위로 큰 키를 드러냈다. 군중 환호에 답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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