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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한 달 30억 벌다 다 귀찮다며 한국 택한 까닭은?
한국 ‘열혈 아줌마’의 무모한 도전정신...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세계적인 것
 
한국경제 기사입력 :  2012/02/1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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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한 달 30억 벌다 다 귀찮다며 한국 택한 까닭은?

 
 
입력: 2012-02-19 09:25 / 수정: 2012-02-19 10:24
누구나 살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마주하는 시기를 겪는다. 켜켜이 쌓인 삶의 나이테 사이에서 다음 챕터를 시작하기 위한 해답은 무엇일지 고민한다. 한국 토종 가방·액세서리 브랜드 ‘쿠미오리(qoomiori)’로 인생 2막을 열어젖힌 이지남 퓨리탄(주) 대표의 방법은 조금 엉뚱(?)했다. 그의 결론은 ‘애국심’. 그래서일까. 헤어 액세서리 스토어 ‘소호(Soho)’로 ‘대박’을 안겨줬던 미국을 과감히 버렸다. 나라를 사랑하는 브랜드 ‘쿠미오리’와 컬처 크리에이터 이 대표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디자이너 겸 대표이사냐고 묻자 제동을 건다. 사업가도, 디자이너도 아닌 ‘컬처 크리에이터(culture creator·문화 창조자)’란다. 이지남 퓨리탄(주) 대표는 한술 더 떠 지난해 자신이 론칭한 브랜드 ‘쿠미오리’를 ‘나라를 사랑하는 브랜드’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콘셉트를 물어보는 질문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답변인가.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미국에서 헤어 액세서리와 주얼리 스토어인 ‘소호’를 10개나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어봤어요. 가게당 월 매출이 2억~3억 원 정도씩 나와서 매년 200여 개 소호 프랜차이즈 스토어 가운데 톱 셀러(top seller)에 선정되기도 했죠. 사업이 너무 재미있었지만, 셋째 아이 출산 후 산후우울증 비슷한 게 찾아왔어요. 갑자기 인생이 너무 허무한 겁니다. 내가 이렇게 돈 벌다가 가는 존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면서 ‘나는 왜 태어났나’ 하는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됐죠. 이런저런 과정 끝에 얻은 답이 세계를 위해 일하고 남을 위해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6개월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죠.”

한국 ‘열혈 아줌마’의 무모한 도전정신

1973년생인 이 대표는 성장한 시대를 감안한다면, 시쳇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카프리 섬보다 아름답다는 경상남도 사천(일명 삼천포) 출신으로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 ‘이대(이화여대) 나온 여자’다. 학부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곧바로 결혼,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미시간주에서 조선공학 전공자인 유학생 남편 내조에 전념했다. 하지만 남편의 외조 정신이 그의 내조 정신을 앞질렀던 덕에 도미 1년 만인 1998년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에 미국서 패션마케팅 공부를 조금 하긴 했는데,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 패션은 제 성향과는 맞지 않았어요. 답답해하는 저한테 남편이 공부하러 가라고 독려를 했죠. ‘너 같은 사람이 패션을 안 하면 패션계가 죽는다’고 하면서요. 하하.”

밀라노 마랑고니 패션학교(Instituto Marangoni)에서 그는 실용적이면서도 아티스트적인 패션의 뿌리를 접했다. 하지만 2년의 유학을 마감하고 다시 미국 미시간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몹쓸 병(?)이 또 도졌다. 보고 배운 것이 너무 많으니 한국으로 치자면 시골 같은 미시간이 좁디좁을 수밖에.

“남편은 박사 과정 중이었는데, 미시간에서는 제가 할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첫 아들을 출산했지만 패션은 손을 놓으면 도태되는 분야라 좌절하고 있었죠. 어느 날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언니이기도 한 패션 디자이너 이효재 씨가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소호 숍에 한 번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헤어 액세서리 전문 숍이었는데 잘 되더라고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더니 언니가 대뜸 뉴욕에 있는 소호 숍을 인수해서 운영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그때만 해도 패션(옷)을 하고 싶었던 터라 우선 세일즈를 하면서 고객을 읽고 싶은 마음에 대뜸 인수를 결정했죠.”

그때가 2001년이다. 뉴욕시 북쪽 부촌에 입지한 웨스트체스터 몰(mall) 안에 있었던 소호를 인수했다. 11개월 바기 아들을 데리고 사업하는 것도 모자라 박사 과정 중이었던 남편을 미시간에 남겨둔 채 홀로 뉴욕으로 이사를 갔으니 ‘열혈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사람을 워낙 좋아했던 천성 덕을 봤을까. 얼떨결에 대출까지 받아 인수한 첫 번째 가게는 자신도 믿기 어려울 만큼 손님이 들끓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물건을 잔뜩 들고 ‘제발 계산 좀 해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길게 줄을 늘어서기 일쑤였다고. 지역 유지, 부잣집 사모님들은 고객을 넘어 친구가 됐고, 오픈 3개월 만에 그는 빚 한 푼 안 내고 두 번째 소호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주류사회 부촌 공략해 ‘대박 행진’

두 번째 스토어는 뉴욕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인 코네티컷주 웨스트팜 몰이었다. 웨스트팜 몰 역시 부촌에 위치한 고급 백화점. 뉴욕점 오픈 때 받았던 대출을 3개월 만에 다 갚고 자기자본금으로 두 번째 가게를 낸 후부터 뉴욕과 코네티컷을 오가며 가게를 관리했다. 한 번 붙은 가속도는 정체할 줄 몰랐다. 사업 2년 차인 2003년 한 해 코네티컷 숍을 필두로 텍사스주에 4개점을 열었다.
 
이 대표가 운영하는 소호는 이어 버지니아, 메릴랜드, 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 10여 개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10개 모두 직영으로 운영했던 탓에 1년 내내 집과 타지를 돌아다녀야 했다. 미국에서 아이 키우는 워킹맘으로서는 상상만으로도 어려운 생활이 지속됐다. 그러면서도 가게당 월 매출을 2억~3억 원씩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비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소호 상품들이 헤어 액세서리치고는 고가라 비싼 것은 하나에 100달러씩 했죠. 한 번은 옷차림이 약간 허름한 고객이 한 분 오셨는데, 직원들은 물건을 살 사람 같지 않았는지 손님을 내버려두더라고요. 제가 다가가서 스타일별로 여러 가지 세트를 권해드렸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한번에 1만 달러가 넘게 구입했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까지는 200개가 넘는 소호 스토어 어디에서도 1회 판매액으로는 깨지 못했던 기록이었죠.(웃음)”

철저하게 부촌만을 겨냥했던 점, 패션 전공자답게 전체 코디네이션을 고려한 상품 제안 방식 등 그의 마케팅이 100% 적중했다. 하지만 몸이 하나인 이상 10개나 되는 직영점의 매출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어떤 직원도 ‘보스’만큼 열정적으로 세일즈를 하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안한 관리 노하우가 바로 ‘필드 매니저’ 시스템이다. 각 스토어 매니저 3인을 관리하는 필드 매니저를 고용하고, 그들이 목표 매출을 달성했을 때 파격적인 커미션을 제공했다.

오픈하는 가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자 나중엔 남편이 사업을 도우며 본격적인 외조를 시작했고,‘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미국에서 하루 몇 백 명의 고객을 만나면서 그는 세계 시장을 읽을 수 있었다.


미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2008년 이전까지의 ‘과거사’. 2008년 돌연 온 가족이 귀국한 사연이 궁금했다.

“셋째 아들을 낳고 산후우울증 같은 게 왔어요. 출산 당일까지 일한 적도 있고, 가게 화장실에서 모유를 짜가면서 억척스럽게 일을 했었는데, 내가 이렇게 돈만 벌다 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됐죠. 마침 그때 남편도 비슷한 고민에 봉착했는데, 장고 끝에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자는 결론하에 미련 없이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돈이 목표가 되는 양 흘러가는 삶에 대한 반기와 함께 사실은 세 아들이 겪게 될 ‘정체성’ 문제에 관한 부모로서의 고민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 사회에서 영원히 ‘주류’가 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많은 사연 가운데 가장 아팠던 에피소드 하나를 끄집어냈다.

“버지니아주에 살 때였죠. 차로 7시간 거리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로 출장을 갈 때였는데, 밤 운전을 하고 가면 피곤하니까 중간에 홀리데이인 같은 작은 호텔에 묵을 때가 많았어요.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새벽에 누군가가 문고리를 따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때 고급차를 몰았는데 주차장에 있는 차를 보고 습격한 것 같았어요. 911 상담원에게 제발 전화를 끊지 말라고 울면서 애원하며 경찰을 기다렸는데, 경찰이 출동했을 땐 강도들이 도망가고 없었죠. 그런데 경찰이 방문을 열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 아무도 없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냐’ 하더라고요. 어찌나 기가 막힌지 울면서 당신 같으면 이 밤중에 이런 쇼를 하겠느냐며 소리를 질렀어요. 제가 백인 여성이었어도 경찰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난 이 나라에서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구나 싶더라고요.”

돈이 있어도, 부유층 친구들이 많아도 결코 스며들 수 없는 유리벽을 느낀 것은 비단 호텔 사건 때뿐만은 아니었다. 뼛속까지 한국인으로서, 또 부모로서 유리벽에 대한 고민은 점점 커져갔고, 그럴수록 그는 아이들의 ‘뿌리’를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가 하는 고민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귀국 후 저희 부부가 생각했던 것은 재단의 형태였는데, 그때 제 사명과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됐어요. 저희가 미국 사회에서 그랬듯, 한국에 다문화가정이 많더라고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제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애다문화학교 지원도 시작하게 됐죠. 그러면서 아름다운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 역시 제 사명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세계적인 것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수백만 원짜리 해외 명품 가방에는 열광하면서 우리 전통적인 것들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은 급기야 지난해 6월 ‘쿠미오리’라는 토종 브랜드 론칭으로 결실을 맺었다. 히브리어로 ‘일어나라’ 또는 ‘빛을 발하라’라는 뜻을 가진 ‘쿠미오리’는 가방·액세서리 브랜드. 이 대표는 대표 겸 디자이너로 궁의 둥근 처마, 신윤복의 <미인도>, 태극기, 거북선, 무궁화 등을 모티브로 독특한 디자인의 가방과 액세서리를 선보였다.

“가죽에 염색도 직접 해요. 어릴 적 삼천포에서 보고 자란 자연의 색감에 감사하죠. 가방 안감은 서울시에서 선정한 50여 가지 서울색을 활용해요. 저도 예전엔 명품 백만 들고 다녔던 터라 명품의 퀄리티를 육감적으로 알고 있어요. 최상급 가죽을 찾기 위해 발품을 엄청나게 팔고 다닌 덕에 명품 브랜드에 납품하는 최고의 원단도 확보했어요. 운 좋게도 신애라 씨 같은 톱스타가 드라마에서 들어준 덕분에 인지도도 상승했고요.(웃음)”

포털 사이트에서 ‘쿠미오리’를 검색하면 ‘신애라 가방’이라는 단어가 동반 검색어로 뜰 정도로 스타의 ‘후광’도 봤다. 하지만 이 대표가 쿠미오리를 통해 가방을 드는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담화(談話)는 그 이상이다. 한국의 문화적 독창성, 실용성, 펀(fun)한 스토리를 나누고 싶다. 예를 들면 ‘문라이트’ 클러치 속에 휘영청 보름달이 뜬 창덕궁에서의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의 러브 스토리를 담는 식이다.

지난해 8월 헌종의 러브 스토리를 담은 ‘문라이트’ 클러치는 장재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이끄는 현대음악 그룹인 ‘태싯그룹(Tacit Group)’을 통해 덴마크 왕비인 마르그레테 2세(Margrethe II)에게 전달된 바 있다. 8월에 이어 11월에는 서울시 지원사업인 ‘동대문 패션 트레이드 쇼 2011’에서 쿠미오리가 1등을 차지해 중국 상하이와 라사 등 해외 진출의 물꼬도 텄다.

“외국에 살면서 한류, K-팝(K-POP)이 크게 인기를 모으는 것은 기뻤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아쉬웠어요. 동대문에서 저렴한 상품만 찾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요즘은 한국의 고품격 핸드메이드 제품을 찾고 있어요. 이럴 때 누군가는 우리 문화를 트렌드에 맞게 해석해 세계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 모델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 싶어요.(웃음)”

쿠미오리는 무거워서 오히려 짐이 되는 명품 가방을 거부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부담 없이 들 수 있는 품위 있는 핸드메이드 가방, 그래서 쿠미오리는 30만~40만 원대의 ‘정직한’ 가격정책고수할 것이라고 한다. 드는 사람을 빛나게 하는 가방, 드는 사람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가방, 그것이 가방을 만드는 사람의 꿈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왜 이토록 애국심에 집착하는지 물어봤다.

“하하. 가풍인 것 같아요. 외할아버지(황준)께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제강점기 만주에 한국 학교를 짓다가 피살당하신 독립투사였어요. 아버지 역시 애국가를 휴대전화 컬러링으로 쓰실 정도로 나라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이시고요.”

처음 그를 만날 때 많은 것을 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면, 그와 헤어질 즈음엔 할 일이 많은 사람 같아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MONEY 제81호 제공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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