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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8) 반격의 칼을 갈다
안성까지 밀린 뒤 ‘중공군 잘 아는 중국인’ 화교 수색대 투입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0/01/24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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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18) 반격의 칼을 갈다 [중앙일보]


2010.01.23 02:34 입력 / 2010.01.23 03:44 수정

안성까지 밀린 뒤 ‘중공군 잘 아는 중국인’ 화교 수색대 투입

전선은 마침내 북위 37도 선까지 밀렸다. 1951년 1월의 일이다.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워낙 거셌고, 한 번 밀리기 시작한 국군과 연합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남하했다. 그러나 전열을 갖춰야 했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한 뒤에 반격을 해야 할 시점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미 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가슴에 항상 수류탄을 걸고 다녔다. 워커 장군에게 뒤지지 않는 맹장(猛將)이었다. 그는 반격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는 부임 직후인 51년 1월 초에 중공군의 공세가 다시 불붙었다는 보고를 받고 곧 의정부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국군 6사단과 미군 25사단 병사들이 형편없이 적군에 쫓겨 후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몹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각하가 한국군을 통솔할 만한 지도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군의 정신적 기강이 매우 해이해졌다는 지적에 이은 폭탄선언이었다.

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1951년 1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매튜 리지웨이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장병 기강을 강조했다. 이 무렵 장병 격려를 위한 정부 요인의 부대 방문이 잇따랐다. 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백선엽 당시 국군 1사단장, 신성모 국방부 장관, 장면 국무총리. [백선엽 장군 제공]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한국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일선 부대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부대를 찾아 장병을 격려했다. 전쟁이 발발한 뒤 일선 현장을 돌면서 늘 눈물을 흘려 ‘낙루(落淚)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국군 1사단을 찾아온 자리에서도 급기야 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일부 장병도 눈시울을 붉혔던 장면을 기억한다.

나는 신임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이 한국군을 탓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국군은 미군에 비해 무기와 보급이 형편없는 상황에서도 잘 싸웠다. 그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서 분투한 점은 인정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적에 등을 돌리고 후퇴했던 점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대목이었다. 문제는 기강이었다.

안성(安城)에 주둔한 국군 1사단은 지금 고속도로 휴게소가 들어서 있는 입장에 사령부를 만들었다. 당장 급한 것은 군기(軍紀)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평안북도 태천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북위 37도 선까지 밀려 내려온 전선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사단 전투원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게 가장 필요했다.

유흥수 부사단장을 불렀다. 나는 “군의 기강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장병의 정신무장도 중요하다. 철저하게 훈련시켜 반격 채비를 갖춰야 한다”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주문했다. 사격을 포함한 전투능력 증강이 우선이다. 아울러 정신무장도 다시 해야 한다. 나는 각 연대와 대대를 돌아다니면서 장병을 대상으로 직접 정신훈화에 나서기도 했다.

국군 1사단이 속해 있던 미 1군단의 정면에는 적의 그림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거세게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의 공세는 오산과 금량장(지금의 용인)까지 내려온 뒤 멈춘 상태였다. 나는 소규모의 병력을 접적(接敵) 지역에 파견해 수색정찰을 계속하면서 부대의 훈련과 정비에 힘을 쏟았다.

조재미 대령의 후임으로 15연대장을 맡은 김안일(예비역 준장) 중령이 이때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중공군과 싸우려면 그들을 잘 아는 중국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야기인즉슨,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華僑) 청년들을 활용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럴듯했다. 김안일 중령은 즉시 수소문 끝에 화교 청년 50여 명을 모아 왔다. 그는 이들로 수색대를 편성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던가.

화교 수색대는 즉시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중공군 포로를 잡거나 그들로부터 충실한 정보를 얻어 왔다. 평양에서 임진강, 그리고 안성까지 밀려 내려오면서 줄곧 지켜본 바로는 중공군은 이미 지쳐 있었다. 화교 수색대에 잡혀 온 포로들도 분명히 피곤에 절어 있었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린 기색이 역력했다. 보급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무명으로 만든 군복은 물이 스며 동상(凍傷)에 노출돼 있었고, 장티푸스 등 전염병도 돌고 있었다. 어떤 포로는 사흘 싸우고 사흘은 굶으면서 전투를 해 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두운 밤에 피리와 꽹과리를 동원해 기습으로 몰고 내려오던 두려움의 대상 중공군의 실체가 이제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약점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줄곧 공세를 퍼붓던 중공군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들을 밀어내면서 전선을 북쪽으로 힘껏 밀어붙여야 할 때다. 차분하게 전선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면서 실력을 다지는 게 중요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백선엽 장군
 
[전쟁사 돋보기] 수색대중앙일보201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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