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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단 두사람 소현세자와 강빈
신하의 나라로 전락한 조선
 
야후불로그 기사입력 :  2008/07/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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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인물열전
2008/07/04 오후 4:30 | 한국사인물열전

이 세상의 단 두사람 소현세자와 강빈


신하의 나라로 전락한 조선

 최근 각 방송사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아 경쟁적으로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그중 일지매는 조선시대 야설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실존 인물이라 보기는 다소 힘들고, 다른 드라마는 순수 창작 케릭터이다.
 아무튼  시기적으로는 다소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일지매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광해군 4∼인조 23)) 가 아직 청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인조 때가 배경이고, 다른 드라마는 소현세자 일가가 화를 당한 후 그 동생 봉림대군이 왕위에 즉위한 효종시대가 배경이다.

 특히  사회에 만연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전체적인 스토리는, 인조당시 자체적인 해결능력이 부족하였던 시대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대의 모순과 절망속에 희생량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 바로 소현세자와 강빈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원자로 당연히 왕위계승권 서열 1위였다. 그러나 조선 전체를 집어삼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를 불행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말았다.
 정묘호란은 1627년 조선과 여진족간에 일어난 1차 전쟁이었는데, 당시 여진족은 후금국을 건설하고 하루가 다르게 약진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일어난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국력이 크게 피폐해진 상태였으며, 더구나 인조는 광해군의 친여진정책에 반발하여 1624년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처음부터 후금국과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지 겨우 3년만에 후금국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는 후금이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상호평등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1636년에 벌어진 병자호란은 청국 (淸國)으로 국호를 개칭한 여진족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인조는 삼존도(三田渡지금의 서울 송파구일대)에서 굴욕족인 항복의식을 거행하였다.
 아무튼 그때 맺어진 항복조건에 따라, 조선은 청국으로 개칭한 여진족에 대해 신하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무려 50만명이나 되는 조선여인을 비롯한 왕세자 3명을 인질로 끌고 갔는데 그 중에 소현세자도 있었다.

 꿈꾸던 8년간의 청생활

 그런데 옛 고사성어에는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된다는 뜻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에 패하여 적국의 인질로 끌려간 것은 분명 화 였지만, 그때문에 그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빚까지 내가면서 자식들을 해외유학으로 보내지만, 당시 왕실의 자식교육은  유교적 소양을 갖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행동이 더욱 제약되었다.  

 그러나 청국에 온 강빈(姜嬪?∼1646 (?∼인조 24)은 그런 제약에서 상당히 자유로울수 있었고,  소현세자역시 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의 조선의 실정을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하지만 현실적으로 소현세자가 청국에서 마음껏 활동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을 해결 해 준 것이 바로 강빈이었다. 강빈은 사무역을 통해 조선의 종이라던가 표범가죽등을  거래해 상당한 재력을 축척할 수 있었다. 다만 사무역은 당시 조선이 국법으로 금한 것이어서, 이것역시 훗날 불행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강빈은 청국을 세운 여진족이 전통적인 유목민족으로서, 농사짖는 일에는 매우 서툴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문제는 놀고있는 풍요로운 땅이 널려 있는데도,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강빈은 유랑민으로 전락했던 한족과 조선인들을  대거 고용하고 우마차등을 사들여  대규모 농장을 개척하였고, 여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또한 식량난을 겪고 있던 청국으로서도 상당한 도움을 받게 되어서, 소현세자내외에 더욱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신부 아담샬과 만나 발달된 서구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담샬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와 각종 근대기기들은 온통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 뿐이었다.그렇게 소현세자는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청국조차 서구의 뛰어난 과학과 기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속에는 이 놀라운 문명의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조선으로 가져가서, 조선을 청국 못지않은 근대 국가로 발전 시킬 생각 뿐이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기기들을 직접보게 된다면, 그의 아버지인 인조조차도 분명 크게 놀라워 하며 기뻐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반면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도 그리 큰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야만족이라 멸시하였던 여진족에게 볼모로 잡혀 오히려 멸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에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왕자들의 행보에 대해, 인조는 매우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소현세자가 조선의 국교인 유학보다 천주교를 가까이 하고 있다는 소식은 인조를 너무나 화나게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 귀인 조씨와 김자점등은 소현세자가 청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다는 등 각종 모략을 일삼았다.
김자점은 인조반정당시 참여하였던 1등공신이었으며, 또 소현세자의 측근을 자처하는 인물이었다.그러나 인조가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긴것을 눈치 첸 후 귀인조씨등과 한통석이 되어 소현세자를 집중적으로 모략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소현세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인조는 김자점의 부축임이 더해져, 점점더 극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그런 인조의 반응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볼모로 잡힌지 8년만에 억류생활에서 풀려나, 다음해인 1645년 2월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버지인 인조로부터 냉대를 받기 시작하였다.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가장 큰 명분이 북방야만족과 야합하였다는 것인데, 소현세자는 그 명분을 정면으로 위배한 셈이었다.
 반면 봉림대군은 끝까지 자존감을 잃지않고 아버지의 대의명분을 지켜갈 제목감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소현세자에 대한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바뀌자,  여성도 충분히 사회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강빈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소현세자는 스스로가 너무도 놀라워 했고 신비로워 했던 서구 문명의 기계와 책자들을 보게되면 아버지의 생각도 달라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소현세자가 서양서적과 기계들을 펼쳐 보이자, 인조는 옆에 있던 벼루를 집어던져 소현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흐르기까지 하였다.

이 세상에 단 두사람뿐이었던 그들의 꿈

 그때서야 소현세자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아버지인 인조의 마음속에서 그는 지워져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병석에 눞고 말았다.  병자호란등의 여파로 반청감정이 극에 달한 시대상에 비추어 봤을 때, 그와같은 꿈을 꾸는 이는 조선사회에 오직 두명 소현세자와 강빈뿐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끊나지 않았다. 사실상 왕위계승은 봉림대군쪽으로 기울어 졌지만, 소현세자가 살아있는 이상 인조마음대로 왕위계승을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인조의 주치이인 이형익은 소현세자의 열을 내리기 위해 세차례 시침을 행하였다. 그런데 3일 후 소현세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비문에는 '환궁 이후 계속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이 시술이 잘못되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것은 음모의 일부였다. 개인적으로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선시대 최대의 음모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과연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시침 실수에 의해 3일만에 사망하였을까? 인조실록에는 그의 주검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나와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만에 사망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많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독살이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는 문구는 더욱도 음폐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시체 확인도 극도로 제한하여, 오직한명 왕실종친이었던 이세완만이 소현세자의 주검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만약 그의 증언마저 없었다면 소현세자의 죽음은 영원히 역사속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장례절차 역시 많은 의문이 들게한다. 보통 종친이 사망해도 시술을 잘못한 의원이 징계를 받는것은 당연하였지만, 왕위 계승권자인 소현세자의 시술을 잘못하였다는 이형익은 전혀 징계받지 않았다.
 더구나 인조는 이형익에 대한 치죄자체를 불허하였으며, 그래도 이형익에게 죄를 물어야 된다고 주장한 김광현을 강빈의  조카사위란 이유로 자천시켜 버렸다.
아무리 미워도 사사롭게 소현세자는 인조의 자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인조는 살아있을 때 보다 이미 세상에 없는 소현세자에게 더욱 가혹하였다.

 그의 장례절차는 당연히 세자의 예를 갖춰야 했지만, 일반 사대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절차만을 행하였으며 그나마도 기일을 대폭 단축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사망함에 따라 그때까지도 청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봉림대군은 급히 귀국하게 되었고, 인조는 그가 귀국하자마자 세손을 원손으로 삼아야 한다는 대신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하였다.

 아무튼 봉림대군은 인조가 사망하는 4년 후 1649년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분이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소현세자 일가에 밀어닥친 비극

 이제 남은 것은 세아이의 어머니인 강빈뿐이었다. 강빈이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이 세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조의 독선은 멈추지 않았다. 인조는 강빈의 친오라비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강빈역시 1646년 3월 소현세자가 사망한지 1년만에 사사(賜死)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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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소재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인 영희원. 

  그녀의 죄목은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죽일 죄이겠지만, 그것은 인조의 후궁 조씨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뿐이었고, 그녀의 사형을 주장하는 대신역시 김자점 단 한명뿐이엇다. 또  일반 역적의 예와는 달리 본가에서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며, 예장하고 3년 동안 제물(祭物)을 지급한 것으로 봐서, 선조역시 강빈이 무고함을 알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많은 대신들은 강빈의 무고함을 주장하였는데 특히 강백년 (姜柏年)년은 그녀의 무고함을 상소하다가 삭직까지 당하였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유일하게 지켜 줄 어머니를 잃은 세아이의 운명은 가혹할 수 밖에 없었다. 유배당시 그들은 각각 12살 8살 4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인조는 어린나이를 배려하여 세아이를 모두 제주도 한곳에 살고록 하고 내시 김광택(金光澤)과 나인 옥진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장남  이석철(李石鐵)은 1648년 9월달에, 차남 이석린(李石麟)은 그해 11월에 각각 사망하고 말았다.

 인조가 고의적으로 그들을 사사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두 형제의 사망소식을 접한 후 나인 옥진등을 문초하였지만,
“두 아이가 죽은 것은 토질(土疾) 탓이지 보양(保養)을 삼가지 않은 탓이 아닙니다.”란 자백만을 받았다.  나인 옥진은 재차 문초를 받다가 사망하고 말았으며, 그때문에 다른 나인 2명에 대한  형신이 중지되었다.

하지만 나인 옥진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가장 나이어린 막내부터  사망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조차 음모의 희생량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김광택이 동행했을때, 이미 세형제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쩌면 이들 3형제의 사망 배후세력에는 인조보다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좌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뜻밖에 인조가 어린 세손들에게만은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김좌점도 마지막 계획을 잠시 미뤄 둘 수 밖에 없었고, 다음해 5월 인조의 사망과함께,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소현세자의 3남 이석견을 구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효종은 선대왕대에 마무리 된 것처럼 보였던 두형제의 사망을 재조사하여, 김광택을 치죄한것으로 봐도 제2의 음모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였다.  그 음모세력의 주축세력은 역시 김좌점과 귀인조씨이다.
 이들은 효종재위 2년만에 역모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결국 모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유일한 핏줄인  이석견(李石堅)은,  
1656년 효종 7년 경안군(慶安君)으로 복위되었다. 또한 강백년을 비롯한 그녀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삭직당하거나 좌천당한 사람역시  모두 사면되거나  복권 되었는데 , 특히 강백년은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하였다.

 민회빈 강씨 역시 숙종 44년(1718)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위되고, 고종 7년(1903)에는 무덤을 영희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만약 선조를 독살하려 하였던 고변이 사실이라면 그렇게까지 공개적으로 구명활동을 하거나, 이후 관련인사의 조기복권및 강빈의 복위는 이루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강빈역시 음모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잃어버린 것과 지켜진 것



 이렇게 소현세자 내외는 철저하게 소외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연 그들이 청국에서 보낸 행동을 매국행위로 볼 수 있을까?
 물론 당시 반청감정이 최고조로 다다른 분위기에서 소현세자의 행보는 다소 섣부른 감도 있었고, 충분히 오해의 소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다. 그냥 세자책봉을 폐하는 정도로 충분히 죄를 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무덤은 소경원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내 위치해 있다고 하는데, 사진자료를 구하지 못하겠네요.


 당시 조선은 청국에게 결정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인조는 마음대로 세자를 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세자를 폐한다고 하여도, 소현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청국은 그것을 인정할리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을 빌미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것이 청국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비밀리에 시행했야만 되었다.
 소현세자 내외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숨겨진 음모...그러나 그 음모의 정점에는 국왕이었던 인조가 있었기게, 역사는 그의 죽음을 의문사 정도로 밖에는 기록 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조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단지 의협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조선을 부강하고 선진적인 나라로 만들어,청국을 물리칠 수 있을만한 힘을 배양하는 것이 먼저이다.
 물론  효종에 오른 봉림대군은 나름대로 군사력을 증대시키긴 하였지만,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군사력 증가는 백성들의 세금부담만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청국에 대해 병력의 우위로 밀어부칠 수도 없는 실정이지 않았던가? 청국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조총부대로, 오히려 청국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 정벌에 나서야만 했던 효종시대의 실태를 볼 때, 과연 소현세자 내외를 희생시킨 시대의 모순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아마 소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백년은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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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부분에... 봉림대군이 현종인가요? 효종아닌가요?
08/07/05 (토) 오전 9:41   [나팔꽃]
효종이죠.
08/07/05 (토) 오전 11:11   [] from 118.91.70.19
잘못된 부분이 있어 바로 잡습니다. ;;
08/07/05 (토) 오후 3:02   [히스토리어]
신하의 나라로 전락한 조선... 슬픈 역사에 눈물이 나네요...ㅜ
08/07/09 (수) 오전 12:08   훈이대사
인조 둘째 아들이 효종이고 효종의 장남이 현종입니다
현종때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인가? 둘째인가가 살아남았었기 때문에
효종의 정통성을 따지는 예송논쟁이 벌어졌습니다
08/07/09 (수) 오전 12:26   [bono] from 125.131.104.252
효종의 정통성이 부인된다면 자신의 즉위도 정통성이 없다고 판단한 현종이 훗날 노론이 되는 편의 손을 들어주면서 극심한 정쟁을 낳게 되죠
08/07/09 (수) 오전 12:27   [bono] from 125.131.104.252
저것과는 별개로 특이하게 현종은 역대 조선왕조 중에서
측실이 단 1명도 없던 왕으로도 이름이 있습니다 뭐 성적불구인지 아니면
정조관념이 투철했던진 모르겠지만 유일하게 측실이나 후궁이 단 1명도 없던 왕으로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08/07/09 (수) 오전 12:29   [bono] from 125.131.104.252
조선시대 상놈 쌀10 가마 중9가마 뺏어가고 다시 기득권 찾으려는 독립운동가, 상놈 쌀10가마중 7가마 뺏어가는 친일파, 상놈이 일본에 붙어 반상을 뒤집었다. 친미파 미국에 붙어 반상을 뒤집었다. 부자양반 간난뱅이상놈 시대. 어떤 역사로 양반상놈이 또 뒤바뀌려나.
08/07/09 (수) 오전 1:09   [고양이] from 211.118.198.37
슬픈역사의 한면이군요....
역사는 많은 교훈을 주는데.....
작금의 상황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합니다...
08/07/09 (수) 오전 1:31   순수연굴비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08/07/09 (수) 오전 9:00   [내탓이오]
너무 오자가 많습니다. 왜 인조 자리에 선조가 나오죠? 한번 전체적으로
교정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08/07/09 (수) 오전 9:15   [메뚜기] from 121.162.215.89
북극성 넌 어디놈이고 조선놈이라니 패 죽일놈아
08/07/09 (수) 오전 9:30   [kim08032]
글의 중반부에 자주 인조를 선조로 오타가 있네요
08/07/09 (수) 오전 9:57   [baeyhyh]
북극성, 호랑이.. 너네들 나라로 꺼져라..쓰글 노무시키들..
08/07/09 (수) 오전 10:40   [포로리]
역사를 보고 갑니다.
08/07/09 (수) 오전 10:41   주찬양
부분 오타가 있었지만 잘 읽고 갑니다. 소현세자로 인해 천주교가 소개되었지만 그런 사정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이벽, 이승훈등에 의해 후일 민간에 자생하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여하튼 영조, 인조~ 무서운 아버지들 이군요^^
08/07/09 (수) 오전 10:53   [아지매]
소현세자의 주검을 지켜봤던 진원군 이세완의 방계 후손으로서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도 늘 소현세자의 비극과 광해군의 실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08/07/09 (수) 오전 11:02   [ddosan2003]
역사는 늘 아쉬움을 남기는데 지금도 우리나라의 촛불 등 사회 현상도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어 가고 있어 후세 사람들이 뭐라고 평할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08/07/09 (수) 오전 11:45   [임영일]
잘보고 담아 감니다~~~!!
08/07/09 (수) 오전 11:51   말대가리
잉~~~!!!
안되네~~~ㅋ
08/07/09 (수) 오전 11:53   말대가리
잘~읽고 갑니다~
08/07/09 (수) 오후 12:15   [이소] from 121.136.88.34
내용조앗어유~~~~
08/07/09 (수) 오후 12:41   [이프로]
이조의 몰락은 인조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새로운 서구 문물을 철저히 배척하여 문호 개방에 저극적이었던 소현세자를 독살시켜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뿌리체 말살시킨 것한 것도 그렇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불필요한 청국과의 전쟁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실정을 한 것이 그렇습니다.
08/07/09 (수) 오후 12:57   [oaktree]
잘 읽고 갑니다. 근데 오타가 너무 많네요...
08/07/09 (수) 오후 12:59   [kimmyungok]
불상한 우리네역사네여!
08/07/09 (수) 오후 1:25   [idw12345]
앙~~~~~일럴 술 갈 갈 갈 갈
08/07/09 (수) 오후 1:25   [신성용] from 222.107.222.219
ㅠㅠ
08/07/09 (수) 오후 1:26   [상어]
현재나 과거나 변한것이없네요 지금의 소고기 정국 과 촛불 은 우리 후손 들이 무어라 할까요 답답 하네요
08/07/09 (수) 오후 1:26   [한국의운명] from 125.137.20.110
잘 보고 갑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타만 좀 줄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뭏든 작성하시느라 수고했어요
08/07/09 (수) 오후 1:35   [파란] from 61.249.248.253
소득세,재산세 안내는 상위 10 % 공개 처형해라
걷어 들이지 않는 복지부동 공무원 넘들도 사지를 찢고 3족을 멸해라
깨끗한 대한 민국을 만들자. 지금 대한민국은 피가 너무 더럽다
08/07/09 (수) 오후 1:54   [범숭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사는건 다똑같은디 와이리 굴곡이 많나염
08/07/09 (수) 오후 1:59   [사파리] from 222.233.156.172
바보들~나라못이겨대신들멍청들~소현세자불쌍해요
08/07/09 (수) 오후 2:12   [인조왕미워] from 59.24.151.30
오타및 틀린부분이 몇군데 더 발견되어 재차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꾸벅 (__)
08/07/09 (수) 오후 3:01   [히스토리어]
소현세자 사진위에 선조 오타도 있네요^^ 인조는 소현세자에 열등감도 있었죠..생각의차이인지 입장의 차이인지 ..글고 덧글중에 영조얘기도봤는데 영조는 인조처럼 작정하고 사도세자를 죽이지는 않았는데..(추천)
08/07/09 (수) 오후 3:16   [sky]
역사가 많이 어렵다
08/07/09 (수) 오후 3:20   [들꽃] from 58.87.60.93
사진이 소현세자가 맞나요 ? 정조아버지 사도세자 같은데. 사도세자 관련책에서 봤어요.
08/07/09 (수) 오후 3:36   [jjj] from 221.152.24.120
범승씨 속이다후련함
08/07/09 (수) 오후 3:36   [악플즐]
소현세자도나름 억울하지만 봉림대군도효종으로즉위하여 병사하지만 않았다면 이완 송시열등과 북쪽에 큰소리한번 쳤을건데.. 효종병사도 미스테리
08/07/09 (수) 오후 4:10   [깨순이] from 122.199.124.69
광해군 등 조선시대의 왕자벌 중에 독살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들은 전부 야마토민족인 어머니를 닮은 이로 왕이 허수아비며 환관이 궁중을 장악하고 있슴을 눈치챈 이들이었슴을 알아야 한다. 이 내용들이 점점 퍼지면서 각지의 반군이 끊일 날이 없었으며, 반군의 세력이 왕성할 때 마다 호로족 환관과 양반들은 만주땅에 원병을 요청하여 격퇴시켰던 것이다.
08/07/09 (수) 오후 5:40   [santa3247]
헌데 ai(bird flu?)가 전국에 폭발적으로 퍼지다가 이 촛불시위 이후에 완전히 국민의 관심에서 사라졌네.^*^
08/07/09 (수) 오후 5:48   [santa3247]
애석하기만 함니다, 이런일이 없엇다면 역사는 바뀌었쓸지도 무르는일인데//
08/07/09 (수) 오후 5:51   [이경희] from 218.150.65.71
헐~
08/07/09 (수) 오후 6:01   [정봄이]
영희원이 아니라 국가사적 357호인 영회원입니다. 제가 다녀왔어요.
인조의 후궁 조씨의 음모로 사약을 받았다고 나와있습니다.
죄목은 소현세자를 독살하였고 왕실을 계속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권력에서 밀리니 그런꼴을 당하게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08/07/09 (수) 오후 6:19   [제니퍼] from 124.80.122.202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냐 벼슬이 뭔지.권력이뭔지
08/07/09 (수) 오후 6:46   [자연미인]
조선놈들은 95% 이상이 매국노보다 악질분자들... 재산량에 모순들로 재산형성한 재산이 5억원이상되는자들은.... 매국노들 재산쌓기법..법과 율법을 어긴 법위반자들....
08/07/09 (수) 오후 6:49   [북극성] from 71.242.28.183
소현세자의 죽음이 정말 안타깝다.
08/07/09 (수) 오후 7:11   [juni] from 219.251.86.188
여러분! 조선왕조는 화교왕조였습니다. 그들 조상은 화교였기때문에 그 후손인 이성개가 우리 고려를 중국에 팔아먹고 지가 왕되고 고종은 500억 독일에 빼돌리고 이완용과 일본에 또 팔아먹고 끝난거죠..이제 이씨조선 찬양하지 마세요. 우리 고려인들은 화교후손이 아닙니다.
08/07/09 (수) 오후 7:34   [that123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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