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개석
외교문서 통해 밝혀져…
"임시정부 외교·국방, 중국이 주도해야"
1940년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한국에 중국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국 군사고문을 파견하여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계획했던 사실이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신라대학 배경한 교수(사학과)는 최근 공개된 1940년대 초 중화민국 외교부 당안(외교문서)을 분석하여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배 교수는 '중일전쟁 시기 장개석·국민정부의 대한정책'이란 논문을 12월 말 역사학보에 실을 예정이다.논문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 이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정부는 1944년 9월 중경(重慶) 주재 미국·영국대사와 전후(戰後) 한국문제 처리와 관련된 협의를 갖고 '한국문제연구요강초안(韓國問題硏究綱要草案)'을 작성했다. 이어 그해 10월 국민정부는 이 초안과 관련한 자국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군령부, 경제부, 재정부 등에 공문을 보내 의견수렴에 나섰다.
이때 군령부는 ▲종전과 함께 진행될 연합국측의 한반도 군대 파견 시 중국군도 함께 파견한다 ▲한강 이남은 영국·미국군이, 한강 이북은 중국군이 진주한다 ▲군대의 수는 중국군이 4, 영·미군이 각각 1의 비율로 한다 ▲새로 창설될 한국군은 중국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한다 등의 입장을 정리했다. 군령부는 이어 '소련의 대일 참전 시에도 중국군 중심의 한반도 진공작전은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당시 영국 주재 중국대사이던 고유균(顧維鈞)은 외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일본군의 항복 후 동맹군이 진공하여 한인단체, 영도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임정의 외교·국방·경찰부문에는 3년 기한으로 중국인 고문을 두고 재정·교통부문에는 미국 고문, 위생부문에는 소련 고문을 두어 한국의 임정시기 외교 국방을 우리(중국)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국민정부의 이 같은 전후 한반도 구상은 일본 패망 후 북위 38도를 경계로 한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그 이후(1945년 12월)에도 '한국문제의 대책(韓國問題之對策)'이란 보고서를 통해 친중 인물(親中分子)을 한국 권력에 심고 우수한 청년들을 중국에 유학시켜 한국의 간부로 육성키로 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정책을 멈추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배 교수는 "중국인들의 이러한 한반도 정책은 청(淸)조나 국민정부, 공산당 정부 등 세대와 정부를 뛰어넘어 이어진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며 "최근 중국의 '거친 외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문으로 이 기사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