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말기에 각지에 일어난 반란군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로 인후관용(仁厚寬容)을 표방한 유방과 반대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즉 산을 뽑을 정도로 강했다고 전해지며, 마지막에 자살할 때까지 힘싸움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역사서가 기술하는 항우의 전투력은 가히 사기급이다. 특히 항우의 마지막 싸움인 해하 전투[1] 에서는 30여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수십만 적군을 상대로 3차례나 돌격을 감행, 적장 셋을 해치우고 대장기 3개를 베어넘긴다. 인명피해는 고작 2명. 흠좀무.
돌격대장으로서의 능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거록 전투에서는 진나라의 15만 정예군을 고작 8천 기병으로 개박살내버리고, 수수 전투에서는 3만 기병으로 신양, 사마앙등의 제후들을 베어버리고 유방의 60만 대군을 괴멸시킨다. 도망치다 강에 빠져죽은 유방군만 10여만에 달하며, 이때문에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기록된다. 아무리 중국발 과장이 있다해도 신화에서나 나올 무력이다.
이미지는 힘만 센 맹장으로 취급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통솔력이 뛰어나고 전황을 읽는 능력도 발군인 야전사령관이었다. 만인지적의 고사를 살펴보면 힘만 믿는 멧돼지는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만에 불과한 기병으로 적군 지휘부를 강습, 지휘계통을 마비시키고 적 전력을 분열시킨 다음 각개격파한 수수 전투는 돌격전의 모범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 커리어 내내 무적에 가까운 장수였다.
항우의 뛰어난 무용에 대해서는 설화적인 기록이 많이 전하지만 "검은 한 사람을 대적할 수 있을 뿐 배울 것이 못된다. 劍一人敵, 不足學"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무예 익히는 데 별 흥미가 없었다는 항우를 일기당천의 용사라고 보는 것은 좀 단순한 생각일 수 있다. 항우의 무장으로서 뛰어난 점은 힘과 칼솜씨보다는 전술 및 통솔 능력에 있을 것이다.[2]
하지만 은통을 죽일때 호위병 백명도 혼자 쳐죽이고 기마 닥돌로 적의 전열이나 포위망을 뒤흔드는게 정사인 사기에 예사로 등장하는걸로 보아 설사 과장되었다 해도 항우의 무예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수있다.
하지만 은통을 죽일때 호위병 백명도 혼자 쳐죽이고 기마 닥돌로 적의 전열이나 포위망을 뒤흔드는게 정사인 사기에 예사로 등장하는걸로 보아 설사 과장되었다 해도 항우의 무예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수있다.
항우가 참전한 전투 중 패배한 것은 마지막의 두 전투, 즉 광무산 전투와 해하 전투가 유이하다. 최후의 승자가 진정한 승자라는 격언을 확인시켜 준 격. 전차에 포위당해 죽을뻔한적도 있긴 있지만
다만 눈앞의 적에만 연연하는, 전략적 사고를 결여한 무장이라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시대를 뛰어넘은 전략가였던 한신이 적으로 등장하면서, 항우의 돌격전 신화는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항우가 유방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한신은 조, 연, 제를 휩쓸면서 대항우 포위망을 완성한다. 항우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머릿수에서도 영토에서도 밀리고 군량까지 고갈되어 있었다.
결국 한신과의 유일한 전면전이었던 광무산 전투에서 참패하며 몰락한다. 최후의 해하 전투에서 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해 오강 나루까지 도달,그곳에서 오강의 정장이 항우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준비하면서 다시 강동에서 힘을 키워 재기를 하자고 설득하지만,고향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며 한 진영에 있는 옛 부하 여마통에게 자신의 목을 주기 위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이후 항우의 시체는 높은 현상금을 노린 한나라 병사들간의 쟁탈전 속에 토막났으며(...) 그 쟁탈전 중에 사망자도 나왔다고 전한다(...)
성격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에게 존경으로 대하며 자신의 사람이면 눈물을 흘리며 치료해줄 정도지만 항우 자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신이 모든 공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면이 있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심취해서 다른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일례로 범증은 진나라의 수도를 점거 뒤에 그곳에서 세력을 키우자고 했지만, 항우는 공을 세우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밤길에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장안을 떠났고 - 금의야행(錦衣夜行)의 고사. 더불어 초인목후이관(楚人沐帿而冠)의 고사와도 연결된다. 덕분에 유방은 항우의 큰 견제없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의심도 쓸데없이 많아서, 휘하 최고의 모사인 범증을 헛소문에 속아 해고해버린다. -_-
포악한 면도 많아서 유방에게 옥새를 바친 진의 마지막 황제 자영을 추궁하다가 끝내 죽이고 그에 반발한 사람도 죽이고 항복해 온 3만 군사를 싸그리 생매장시키고 자신이 내세운 명분이었던 초의제도 결국 쫓아내고 죽여버리는 등 민심을 잃을 짓도 많이 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마천은 마지막에 항우가 나는 내 잘못으로 진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진 것이다라고 한 말[4]을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한다고 비판했다. 노나라에서는 그의 죽음을 모르고 계속 유방에 저항했는데 항우의 목을 보여주자 그제서야 항복했다고 한다. 항우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패자라고는 해도 후세 사람들에겐 인기가 높아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한고조에게 패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세가나 열전 대신 본기에 항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본기는 천자, 세가는 제후, 열전은 신하 및 일반인을 다룬다.[5]
몰락부터 죽는 과정이 너무나 처참해서 동정표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그가 목을 찔러 자살하자 상금에 눈이 먼 장수들에 의해 다섯 토막이 나는 장면은 어느 작가들이 쓰건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으로 꼽힌다. 참고로 유방은 다섯 토막난 시체를 가져온 자들에게 상금을 1/5로 줬다(...)[6]
勝敗兵家不可期(승패병가불가기) 병가의 승패는 기약할 수 없으니
包羞忍取是男兒(포수인취시남아)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남아의 일이다.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았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권토중래를 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나온말이 바로 권토중래.包羞忍取是男兒(포수인취시남아)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남아의 일이다.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았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권토중래를 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패왕이라는 칭호는 장량이 항우에게 "님 칭호가 필요한 듯. 삼황오제, 춘추오패, 전국9왕 같은 거 많으니 걍 택일하셈"하니 패와 왕을 섞어서 스스로 패왕이라 붙였다고 전한다. 이 때 범증은 춘추오패의 결말이 모두 좋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항우에게 다른 명칭을 권했다.
여담으로 삼국지 11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여 통솔력은 94에 매력은 95이며 여포와 함께 유이한 무력 100을 자랑하는 특급무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지 무장들에게 암묵적으로 들어가는 부가무력이 항우에게는 없기 때문에 굉장히 드물기는 하지만 여포랑 일기토 붙을때 초살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다만 11 파워업키트 결전제패 모드 미션 ' 용장집결 ' 에서는 그야말로 진 최종보스로 등장, 여포 이겼다고 좋아하던 유저들을 충공깽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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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유명한 사자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 가 나왔다. 한나라군이 사방을 포위하고서 참모인 장량이 항복한 초나라 군인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하여서 초나라군이 사기가 뚝떨어져서 탈영하자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는구나! 라고 한것이 사면초가[2] 근데 저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어차피 나는 1:3이 기본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더 배워서 뭐하겠냐.전쟁은 병사들끼리 싸우게 하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전술,전략에 치중한 것일 수도 있다.아니 그 전에 8천으로 15만 이기고 3만으로 60만 이기고 최후에는 30명 이끌고서 3번이나 스파르타를 한 장수의 무예가 평범 할 리가 없잖아.
[3] 그러나 팽월,경포 같은 특급맹장들은 유방한테 넘어가고 자기랑 맞먹는 무력을 가진 용저는 죽고 브레인이었던 범증까지도 죽었기에 확실히 전력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다. 근데 경포 팽월의 배신과 범증의 축출 및 죽음은 전부 항우 본인이 자초한 면이 크다. 경포나 팽월은 항우가 조금만 달랬더라면 배반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고, 범증은 뻔히 들여다보이는 반간계에도 너무나 직선적인 성격때문에 완전히 넘어가서 축출해버렸다. 반면 유방은 전세가 불리해 한신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한신이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왕을 달라고 했을때도 처음엔 '이놈이 독립하려해?' 라며 진노했다가 진평이 '항우가 아직 살아있는데 님한테 한신 없으면 어찌될까염?' 이라며 진언하니까 '남자가 태어났으면 왕쯤은 해먹어야지 가왕이 뭐냐 가왕이!' 라고 천연덕스레 소리치면서 한신을 제왕으로 임명해 끝까지 부려먹었다.
[4] 이것은 이 항목의 둘째 문단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30여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수십만 적군을 상대로 3차례나 돌격을 감행, 적장 셋을 해치우고 대장기 3개를 베어넘기면서도 인명피해는 고작 2명만 낸 상태에서 남긴 대사이다.
[5] 사기는 천자와 제후를 나누는데 있어서 명분론보다 실제 세력과 영향력을 중시했던 것 같다. 본기에서 유방 다음에 나오는 것도 명분상 천자가 아니라 태후로서 실제로 천하를 호령한 여후이다.
[6] 봉토를 다섯으로 쪼개 여마통은 중수후,왕예는 두연후,양희를 적천후,양무를 오방후,여승을 열양후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