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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스타 박찬종 前의원을 위한 변론‥(1)
"'박찬종'전 의원과 '나'의 인연의 시작"
 
김기백칼럼 기사입력 :  2008/05/30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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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스타 박찬종 前의원을 위한 변론‥
"'박찬종'씨와 '나'의 인연의 시작"
 
 

박찬종 전의원(이하:편의상 박의원 혹은 박찬종씨)은 내가 개인적으로 비교적 잘알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다.
 
박의원과 알게된것은 지난 91년1월하순경인데 좀 특이하다면 특이한 계기가 있어서알게 되었다.
 
그당시는 중동에서 1차 걸프전이 막시작될 무렵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어떤일이 있었냐 하면, 당시 일본수상이었던 가이후라는 자가 일본총리로서는 최초로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을 방문하기로 되어있었다.
 
나는 당시 갓40대 초반에 접어든 나이였고, 그 몇년전부터 김두한씨의 장남 (탈렌트 김을동씨의 이복동생으로 나보다 서너살 적다)이랑 호형호제 하면서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데 일본수상 이라는자가 제대로 사죄도 안한상태에서 다른곳도 아닌, 탑골공원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좌시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독립유공자 유족회장(나보다 7-8세 연장자이고 지금도 유족회장직을 맡고 있다)과 셋이서 회동을 한끝에 절대로 묵과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좀위험하기는 하지만 김두한씨의 장남이 현장에서 할복으로 강경한 분노와항의를 표출하기로 합의를 했다.
 
내가 성명서를 쓰고 현장지휘를 맡기로 하고, 유족회장은 적당한 칼을 준비해오고 뒷수습을 맡기로 각자 역할분담을 약속하고 당일날(1월23일로 기억하고 있음) 정오무렵에 막상 현장에 갔더니 칼을 준비해 오기로한 유족회장이 그냥 빈손으로 와버려서, 단단히 결심한 당사자와 나를 비롯한(현장에서 일단 경찰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는 힘께나 쓰는 젊은 친구들이 몇명 필요해서 대기중이었다)행동팀들이 잠시 당황했으나 도저히 그냥 넘어갈수 없다고 판단한 내가 급히 인근 철물점에가서 비교적 덜 날카로와 보이는 재크나이프 비슷한걸 사가지고 당사자에게 건네주어서 결국 일은 아주 멋지게 성사될수 있었다.
 
왜 "멋지게" 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그날 일본수상의 최초 탑골공원 방문을 보도하기 위해 각 방송국의 카메라는 물론, 신문사 기자들이 총출동해서 막 탑골공원 정문쪽으로 다가오는 일본수상 차량행렬정면 앞에서 딴사람도 아닌 김두한의 장남이자 김좌진 장군의 장손인 30대후반의 덩치좋은(체격이나 골격이 그아버지 보단 좀 못하지만 110k정도 나간다)청년하나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와이셔츠를 찢는것과 동시에 할복을 했으니 당시 한국일보의 만화컷에서는 "일본 수상이 한국에 와서 장군의 손자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할복하는 장면이 tv화면에 그대로 방영되고 일본.대만.미국에서까지 보도되는등, 그당시로서는 보기 드물만큼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던것이다.
 
후일담이지만 배꼽아래로 칼을 갖다대면 자칫 생명까지 위태로울수 있지만, 다른부위와는 달리 배에는 혈관도 없는데다가, 보통사람들은 그냥 삼겹살 정도지만 녀석의 뱃가죽은 최소한 칠겹살내지 구겹살(?)쯤 되는데다가, 고함까지 지르면서 칼을 들이댔으니 걱정했던것보다는 덜 다쳤지만 김두한씨 장남은 지금도 백여바늘(두뼘정도)이상되는 꿰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쨌거나 그직후에 안국동에 있는 한국병원에 입원해서 한달가량 있었는데, 바로 그때 당시에, 박찬종.이기택.이종찬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과광복회를 비롯한 민족단체 원로들은 물론 각계인사들과,수많은 시민들이 격려겸위문차 병원을 방문한것이 내가 박찬종의원과 직접 알게된 계기였던 것이다.
 
묘한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좀 성격이 괴팍해서 였는지(체질상 나는 정치인이든 누구든 유명인사들을 찾아다니거나,쫓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 지금껏 정치인이라고는 박의원밖에 모른다) 그중에서 내눈에 가장 띄고 호감이 갔던 사람이 바로 박찬종씨였던것이다.  
 
그게 인연이 되서 그얼마쯤 뒤부터 지난 99년 무렵까지 박의원 자택과 사무실을 무상출입 (나말고도 그런사람들이 꽤있었다)해왔지만 박의원이 만들었던 신정당에 정식당원으로 입당한적도 없고, 무슨 특별한 직책을 맡은적도 없고, 급료같은것을 받아본적도 없다. 
 
그러다가 그직후인 2000년여름경부터 최근까지 꼬박 6-7년가량을 같은 서울에 살면서 박의원과 김두한씨 장남을 비롯한 과거에 알고 지내던 거의 모든사람들과 단절하다시피 하면서, 방구석에 쳐박혀 인터넷작업(?)에만 몰두하다가 근래에 박의원을 비롯한 몇사람들과 다시 만나게 된것이다.
 
ps : 쓰다보니 생각보다 글이 좀 길어질것 같아 앞으로 1-2차례 더 나누어 쓰야할것 같다.
2006년 9월12일 인터넷 민족신문 발행인: 김기백
민족신문 임시홈피 : http://www.minjokcorea.co.kr
 
 
 
2006/09/12 [11:35]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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