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도 제법 많은 팬을 가진 작가다.
그는 1949년 동성연애자의 내밀한 심정을 장중한 문체로 쓴 첫소설
<가면의 고백>으로 문단에 충격을 던지며 데뷔했다.
1956년에는 전후의 황폐함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린
<긴카쿠 사( 金閣寺)>를 발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허약한 자신의 체질을 바꾸기 위해 검도를 하는 한편,
영화에도 출현하고 나체 사진을 찍는 등 별나게 살았다.
1966년에는 천왕에 대한 충성과 동료들에 대한 우정으로
자살하는 젊은 장교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우국 憂國〉을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는 소설로 흔히 자신의 종말을 예언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소설처럼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할복자살로 마감했다.
사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자살방법이었다.
집에서 조용히 약을 먹고 죽었다면 누가 그를 기억하겠는가!
그가 택한 자살 방법은 일본에서도 사라진 사무라이들의 할복자살!
1970년 그는 4명의 추종자와 함께 자위대 총감실을 점령하고
급히 소집된 1000여 명의 자위대원들에게 천왕에 대한 충성과
일본군의 무장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 후 통감실로 들어가 단도로 배를 가르자
그의 추종자인 모리다가 칼로 그의 목을 쳤다.
미시마 유키오는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가 단검으로 찌른 배의 상처는 겨우 10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그런데 더욱 곤란했던 것은 그의 목을 베기로 한 모리다는 검을 잘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술의 대가만이 단번에 고통스럽지 않게 벨 수 있다고 한다.
운 나쁘게도 그의 목은 단번에 내리쳐지지 않았다.
모리다는 3번씩이나 내리친 끝에 그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3번이나 목이 잘리는 기분을 맛본 끝에 저승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과정과 작품성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네이트 ...
[셋푸쿠(切腹)와 카이샤쿠(介錯)]
셋푸쿠(切腹)는 무사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할복자살을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뱃속이 깨끗하다는 의미로 「명예로운 죽음」을 뜻하기도 하여 전쟁에서 패하거나 궁지에 몰리게 되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다.
옛부터 무가사회에서는 자살을 무사의 꽃이라 하여 미화하고 무사다운 죽음을 칭송했다. 다른 말로는 하라키리(腹切:서양인이 명명했다고 함)라고도 하는데, 할복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당사자의 부탁을 받고 옆에서 목을 쳐주는 것을 카이샤쿠(介錯)라고 한다. 카이샤쿠닌(介錯人:목을 쳐주는 사람)은 목을 완전히 쳐내지 않고, 종이 한장(=紙一枚)정도의 여유를 두고 치는 것이 최고의 기술<검술>이라 한다.
사이고오타카모리(西郷隆盛)는 카고시마현(鹿児島県)의 시로야마(城山)에서 할복을 할 때 심복부하인 벳푸(別府)에게 카이샤쿠(介錯)을 부탁하고 죽었다. 전후 1970년에 미시마유키오(三島幸夫)가 할복했을 때는 카이샤쿠닌(介錯人)등 3명이 자살을 협조 또는 방조를 한 죄로 4년의 징역판결을 받았다. 완전히 목숨이 끊어진 상태가 아닌 사람의 목을 친 것은 일종의 살인행위에 가깝다는 판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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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일본어: 三島 由紀夫 , 1925년 1월 14일 ~ 1970년 11월 25일)는 히라오카 기미타케(일본어: 平岡 公威 )의 필명으로, 일본의 우익작가이자 극작가이다. 그는 전후의 허무주의적이고 탐미주의적인 글과, 할복에 의한 자살로 유명하다.
미시마의 할복이 있고 얼마 후 취재할 일이 있어 일본 인기 작가 시바료타로을 만났었다. 그는 미시마의 행위를 바보같은 짓이라고 비판했던 자기네 수상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미시마의 충격적인 할복 자살을 놓고 세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시대착오적인 망동이다라는 반응. 또 하나는 이해할 수 있다, 경고의 메시지 전달로 죽음의 대가를 치렀다는 반응. 세번째는 뉴스위크처럼, 합리적인 설명을 부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하고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그의 파격적인 죽음 방식이 아니라 일본 사회를 향해 그가 던진 메시지다. "경제적 번영에 들떠 정신적으로 빈 껍데기가 돼가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이규태)
"지금 일본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들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나를 따를 사람은 없는가."
1970년 11월25일, 전쟁전 일본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도쿄의 육상 자위대 동부 지부 2층 발코니에서 '칠생보국' 글자가 적힌 머리 띠를 두르고 흰 장갑 낀 손을 휘두르며 일장 연설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45세의 일본 소설가로 노벨상 후보에도 올랐던 미시마 유키오였다.
이날 오전 10시 40분, 추종자 4명과 사령관실에 난입한 미시마는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자위대원들을 집합시키라고 요구했다. 생중계되는 tv 앞에서 "다함께 궐기하자"고 외친 그에게 자위대 1천여명이 보낸 것은 차가운 경멸이었다. 야유가 터지자 그는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고 사령관실로 들어가 할복 자살했다.
미시마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소설보다 이 자살 방법이었다. 준비한 일본도로 미시마가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자 조수가 목을 쳐주었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방식이었다.
본명 히라오카 기미다케. 농수산성 사무관의 장남으로 태어나 47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 관료 중의 관료들이 모이던 대장성에 들어갔던 엘리트였다. 귀족들이 다니던 가쿠슈인 중등과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일찍부터 문재를 인정받았던 그는 대장성에 들어간 지 1년만에 그만두고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미시마 문학의 특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이야기 전개였다.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기를 기다려 그것부터 쓰기 시작한다. 끝 장면에 어울리도록 앞 얘기를 궁리하며 소설을 써나간다." 미시마가 친구에게 털어놓은 이 말은 그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 다.
순애소설인 '조소', 금각사 화재 사건을 다룬 '금각사' 등 수작을 잇따라 발표해 "일본적 미의식에 바탕한 전후 최대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패전 뒤 허전한 분위기 속에서 가꾸어진 탐미적인 소설이었다. 역시 일본적 미학을 추구하며 탐미주의 길을 걸었던 노벨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의 스승격이었다. 줄곧 편지를 주고 받았던 두 사람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우연일까?
그의 자살 이유가 정치적 저항인지 예술적 좌절인지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 저류에 흐르던 군국주의를 용출시켰고,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보수 우익들의 '우상'이 되어 준동의 계기를 부여했다. 천황제 부활을 내세운 이들의 행동은 고도 성장 사회로 접어든 일본 사회에 하나의 암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