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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꿈꾼 조선청년 ‘가미카제’ 인간폭탄으로
B-29와 충돌뒤 전사…유골 쪼개 ‘군신’으로 선전
 
한겨레신문 기사입력 :  2010/02/1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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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사 꿈꾼 두 조선청년 ‘가미카제’ 인간폭탄으로
한겨레 길윤형 기자
“차츰차츰 고향 산천이 가까워온다. 일요일마다 놀러갔던 강변의 모래만이 보일까, 토끼 잡으러 갔던 그 산봉우리가 어떤 모양일까. 우리 모교의 운동장은 얼마나 크게 보이며 우리 집 뜰에는 올해도 꽃을 심었을까.”(<매일신보> 1943년 9월22일에 실린 이현재의 수기)
 

 앳된 얼굴의 열일곱 소년 이현재(1926~1945)와 김광영(〃~〃)을 태운 95식 연습기는 1943년 9월20일 오전 ○시 ○○비행기지를 이륙했다. 이들은 육군 소년비행병학교의 4월 입학생들로, 그동안 익힌 조종술을 뽐내기 위해 첫 향토 비행에 나선 길이었다. 이날은 미래 전력의 핵심인 항공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제가 1940년 제정한 4번째 항공절이기도 했다. 경성 곳곳에서는 기념행사와 거부들의 항공기 헌납식 등이 열렸다.
 
이현재와 김광영 등 14기 육군소년비행병학교 생도들의 고향방문 소식은 당대 큰 뉴스거리가 됐다. 어려운 집안환경 탓에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식민지 조선의 소년들에게 파일럿은 고등교육과 출세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오후 12시30분 여의도 비행장에 안착한 소년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고향 집과 출신학교를 향해 날아올랐다. 김광영의 모교인 창신국민학교 학생들은 선배의 비행기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운동장에 ‘창신(昌信)’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응원했다. 이현재의 모교 한영중학교는 전교생이 비행장으로 마중을 나가는 소동을 벌였다. 22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이현재의 고향방문 수기를 보면, 꿈에 그리던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날아오르는 10대 소년의 달뜬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두 소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2년 뒤인 45년 5월13일, <매일신보>는 ‘염원은 거함의 격침. 담담한 대의에 순하는 심경’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재작년 9월 그립던 향토방문 비행으로 경성의 하늘에 그 용자를 나타내었던” 두 소년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기사에서 둘은 “어찌하면 적의 큰 함선을 굉침시킬까? 이것만이 내가 소년비행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의 염원이었고, 또한 내가 육탄공격을 할 때까지의 염원일 것”이라고 작전에 나서기 직전의 각오를 밝혔다.
 
 김광영은 기사가 보도된 2주일쯤 뒤인 5월28일, 이현재는 그 다음날인 5월29일 연합군 함대에 육탄공격을 감행하다 숨졌다. 일제는 이들을 오장에서 소위로 세 계급을 추서했고,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 ‘히로오카 겐사이’(이현재)와 ‘가네다 미쓰에이’(김광영)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했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현재의 조카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이현재의 부모·형제는 모두 숨졌으며 우리는 (삼촌의) 강제동원에 대한 사실을 잘 모른다”고 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기사등록 : 2010-02-15 오후 06:36:29 기사수정 : 2010-02-15 오후 09: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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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와 충돌뒤 전사…유골 쪼개 ‘군신’으로 선전
경성법전 ‘엘리트’ 노용우
조종사로 강제 소집당해
한겨레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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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자(74)씨의 기억 속에 큰오빠는 우수에 잠긴 듯, 쓸쓸한 옆모습으로 남아 있다.
 
노씨의 큰오빠의 이름은 노용우(1922~1945·사진)지만, 일본인들에게 그는 본토 폭격을 위해 내습한 미군 b-29기를 맨몸으로 들이받아 격추시킨 ‘황군의 영웅’ 가와다 세이지(河田淸治)로 기억돼 있다.

 
 
노용우는 1922년 12월23일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지화리 245번지에서 2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건설업에 종사하던 아버지가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삼촌과 고모의 집을 옮겨다니며 겨우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인천에 거주하던 고모의 도움으로 인천북상업학교를 마치고 1941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장남이 경성법전에 입학하자 그의 부모는 수원의 세간을 정리해 ‘경성부 북아현정 122번지’로 이사해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경자씨는 “오빠는 자상하고도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 인천 친척 언니네 놀러 갔을 때 일이다. 길을 잃고 울고 있는 노씨를 순경이 발견해 파출소로 데려가 달래고 있었다. 어떻게 집에 연락이 닿았는지, 오빠가 노씨를 데리러 파출소로 찾아왔다. 오빠는 활짝 웃는 얼굴로 동생을 안으며 “이제 안심하라”고 등을 토닥여줬다. 경자씨는 “그때 날 번쩍 안아 어깨에 앉히던 오빠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 노용우의 생전 모습. 왼쪽은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인 1944년 10월께, 오른쪽은 경성법전 재학 시절. 노경자씨 제공

갑작스런 전쟁은 변호사를 꿈꾸던 식민지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1941년 경성법전의 교장으로 취임한 마스다 미치요시(도쿄제국대학 졸업, 경시청 경부, 평양 전매국장, 경상남도 내무국장 등 역임)는 철저한 황민화교육의 신봉자였다. 그는 “입학시험에서 황국국민으로 지성진충(至聖盡忠)의 정신이 어느 정도 있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중략) 졸업하면 바로 지원병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실제 노용우 등 경성법전 재학생 76명 전원을 특별지원병에 지원시켰다.
 
같은 시기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장이었던 가라시마 다케시는 1965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에 “1943년 11월이 되니 (경성의) 각 전문학교장은 다시 소집돼 결정적인 통고를 받았다. ‘지원이지만 적격자 전원을 지원시킬 것.’ 미지원자는 이유를 엄중히 추궁당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되면 강제나 마찬가지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 노경자씨는 2005년 6월16일 일본 후생노동성과 한국 보건복지부를 통해 오빠 노용우의 유골을 인수받았다. 한·일 양국 정부는 언론 취재를 극구 피했다고 한다. 노경자씨 제공

방치되던 ‘관리번호 1036’
누이가 가져다 천안에 모셔

육군에 지원한 노용우는 1943년 10월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1기로 선발돼 전투기 조종사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1800명에 이르는 특조 1기생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인은 노용우(경성법전), 김상필(연희전문), 탁경현(교토약학전문학교), 석교지랑(불명) 등 4명뿐이다. 역시 ‘조선인 특공대’로 목숨을 잃은 김상필의 형수 여태순(작고)씨는 1996년에 펴낸 <그날 오키나와 하늘에서>에서 ‘특별조종견습사관 시험은 경성과 도쿄에서 1·2차로 나눠 치를 만큼 매우 어렵고 까다로워 연희전문 출신 가운데 합격자는 김상필이 유일했다’고 적었다.

 
 
노용우는 규슈 후쿠오카현에 본부가 있던 다치아라이 비행학교 군산 분교 등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1944년 10월1일 정식 소위로 임관했다. 노용우가 배치된 곳은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 폭격기의 수도권 공습의 길목에 해당하는 아이치현 기요스 비행기지 제5전대였다. 경자씨는 “그 무렵 오빠가 사진과 일기장 세 권을 보내오며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일기를 다 태우라’고 편지로 일렀다”고 말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평생 황민화교육을 받고 이제는 죽음 앞에 선 24살 엘리트 청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은 무엇이었을지 우리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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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29일이 밝았다. 이날 오전 8시 노용우는 b-29 편대의 기습 통보를 받고 출격했다. 시즈오카현 가와네초 부근에서 b-29 대부대와 조우한 노용우의 비행기는 적기의 공격으로 날개가 꺾인 상태에서 m. r. 클라크 주니어 중위가 조종하는 b-29를 몸체로 들이받아 격추시켰다. 노용우는 살고 싶었던 듯 추락 직전에 탈출했지만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이틀 뒤 히가시가와네 마을 남쪽 야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의 가슴 주머니 속에는 “부탁한 옷이 되었으니 곧 가져다주겠다”는 여동생의 엽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여동생 경자씨는 “우리는 그런 엽서를 보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엽서의 주인은 오빠의 애인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오빠의 죽음은 북아현정 동네 골목을 가득 채웠던 갑작스런 조화의 물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뭐든 다 들어줄 테니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후 노용우의 유골은 일본인들과 달리 유족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의 유골은 패전 때까지 하늘을 지키는 ‘군신’으로 중부군사령부 등에 쪼개져 안치되다가 1958년 11월 후생성 원호국에 이관됐다. 다른 조선 출신 군인·군속들의 유골과 함께 후생성 2층 창고에 방치되던 그의 유골은 1971년 6월 도쿄 메구로구의 사찰 유텐지로 옮겨졌다. 1970년대 한국 외무부가 작성한 유골관계 문서철에서 찾아낸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 명부’ 속에 그의 이름을 ‘1036번’(관리번호)으로 기록돼 있다. 경자씨는 2005년 6월16일 일본에서 오빠의 유골을 가져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모셨다.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는 노경자씨는 올해 일흔넷이다. 그는 해방 이후 서울사범(지금의 서울 교대)을 나와 40여년 동안 교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이따금 오빠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빠는 똑똑했으니까 안 죽고 어디 외국에서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라 믿다가 1988년에 숨졌다. 살아생전 남편을 보며 “당신은 자식도 잃고, 재산도 다 잃었다”며 자주 울었다고 한다.

안산/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전문군인 대신 단기교육 시켜 ‘일회용 자살공격’ 투입

가미카제란

우리가 ‘가미카제’라 부르는 자살특공대가 처음 일본군의 편제에 등장한 것은 1944년 10월, 필리핀에 사령부를 둔 해군 제1항공함대가 ‘신푸(神風) 특별공격대’라 이름 붙은 특공부대를 편성하면서 부터다. 이 부대가 레이테만의 미군 함정에 몸체 공격을 감행한 뒤 ‘신푸=가미카제’(神風을 일본어의 한자읽기 방법에 따라 음으로 읽으면 신푸, 뜻으로 읽으면 가미카제가 된다)는 적을 향해 몸을 던져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특공’(特攻)의 상징이 됐다.

특공은 결과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지원’의 형태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강제’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오랜 훈련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전문 군인을 ‘일회용 작전’에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학 기간을 단축시킨 학도병과 10대 후반의 소년들을 뽑아 비행 기술을 가르친 뒤 사지로 내몰았다.

특공부대의 선발 경로로는 10대 후반의 소년들에 1년 반 남짓의 비행 조종술을 가르친 육군소년비행병(소비), 대학교·전문학교 졸업 예정자들에게 비행훈련을 시킨 뒤 장교로 내보낸 육군특별조종 견습사관(특조) 등이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인 특공 전사자 16명 가운데 소비(8명)와 특조(5명)가 대부분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최정근 1명밖에 없다. 특공의 전술적 가치는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과 달리 미군 함대의 대응능력이 강화돼 공격 성공률이 6%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향철 광운대 동북아대학 교수(일본경제)는 “특공은 직업군인의 소모를 막기 위해 당대 대학을 졸업한 최고 지식인들과 10대 어린 소년들을 일회용 인간폭탄으로 사용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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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10-02-15 오후 06:51:17 기사수정 : 2010-02-15 오후 06: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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