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진보세력이 국민에게 외면당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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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를 자유로, 무규율을 평등으로 혼동한 진보세력의 인식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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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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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
2008/04/25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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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보세력이 국민에게 외면당한 이유 |
무질서를 자유로, 무규율을 평등으로 혼동한 진보세력의 인식 오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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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24일 (목) 08:03:40 |
공희준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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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저녁마다 공립도서관을 다녔다. 하지만 한동안은 가지 않을 생각이다. 이건 도서관이 아니라 거의 도떼기시장이더라. 중간고사를 맞이한 어린 학생들이 대거 몰려와 열람실을 차지하고 있는데 공부를 하러 온 건지 놀러온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교실에서도 틈마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에게 공공도서관에서의 정숙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가 있다. 더군다나 공공도서관에는 학교와는 다르게 학생들의 일탈행동을 단속할 지도교사가 없다. 밤에는 당직을 서는 사서 한두 명과 용원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혼자서 도서관 시설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 게다가 말이 애들이지 발육상태가 좋아서 덩치들이 웬만한 어깨들 못지않다. 두발이 짧은 녀석들은 ‘깍두기’와 비슷한 외양마저 풍긴다. 중간고사가 끝나는 5월 중순쯤에야 도서관은 원래의 조용한 분위기를 되찾을 성싶다.
군부독재시절의 강압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다룬 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말죽거리 잔혹사’ 따위의. 감독은 은막을 빌려서 폭력적 규율이 판치는 보수적 사회상을 고발했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권위주의 체제의 억압적 환경 아래서 양육된 세대는 진보적이 된 반면, 민주화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라난 세대가 되레 수구반동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한국사회는 뭐든지 극단으로 치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폭력적 규율이 판치는 사회를 바꾸자는 취지는 훌륭했다. 문제는 일종의 보상심리가 발동한 나머지 모든 규율을 그 성격을 불문하고 전봇대 뽑듯이 뽑아버리려는 그릇된 풍조가 만연했다는 점이다. 전교조가 최근 침체에 빠진 원인은 학부모 일반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는 데 실패한 탓이 크다. 교육현장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겠다는 창립 취지와는 달리 현재는 학생들의 요구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애들 프렌들리한 민원창구쯤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국민원로는 솔직히 말해서 두발자유화와 교육개혁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통제와 보호는 동전의 양면이다. 통제는 보호에 수반되는 대가다. 통제와 보호를 지금처럼 계속 적대관계로 파악했다가 유치원생들까지 들고 일어나 노란색깔의 복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면 어찌할 작정인가? 어린이들에게 노란색 웃옷을 입히는 이유는 노란색의 높은 명도가 아이들을 교통사고 등의 안전사고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자. 공공도서관에 공부하려고 올 정도면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성적 우수한 모범생들일 게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많은 급료와 권력이 주어지는 자리에 올라갈 확률이 높은, 즉 출세할 가능성이 짙은 학생들이란 뜻이다. 정숙을 유지해야 하는 공공도서관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하면 어떠한 인간형으로 귀결될까?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다. 삼성사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에 근무하는 임직원들도, 삼성에서 떡값을 받아쳐먹은 고위 공직자들도, 삼성재벌의 불법적 경영권 상속에 면죄부를 부여한 특검 관계자들도, 이건희 일가의 시중을 드는 법무법인 김앤장의 변호사들도, 삼성 수뇌부의 불법행위를 명백히 인지하고서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 조중동 기자들도 어렸을 적에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었다. 어렸을 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었던 한국사회의 엘리트들의 유전자에 장기간에 걸쳐 각인된 암적 요소는 무엇일까? 이유 없는 구타와 지나친 체벌이 낳은 폭력적 군사문화? 아니다. 권리와 의무는 따로국밥이며, 권한과 책임은 상극이라는 도둑놈 심보다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대중을 상대로 사기를 친 셈이다. 자신들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유럽 여러 나라들의 진정한 힘의 원천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스웨덴이든, 덴마크든, 네덜란드든, 노르웨이든, 그리고 전후의 독일과 프랑스든 정당하고 합리적 규칙에 복종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누가 그러더라. 한밤중에 길거리에서 고성방가해도 경찰이 붙잡아가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진보는 무질서가 아니라 좋은 질서를, 무규율이 아니라 좋을 규율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옳다. 질서와 규율 자체를 모조리 죄악시하는 까닭에 인면수심의 흉악범의 인권을, 살아서는 출장안마사라 멸시받다가 죽어서는 시신조차 회수할 길 없어진 정말로 불쌍하고 가엾은 수십 명 하층계급 여성들의 인권보다 더 중시하는 코미디를 연출하는 것이다. 바로 진보개혁파라는 작자들이.
혜진이-예슬이 피살사건에서 나는 아이들이 살인범에게 납치됐다는 누추한 골목길 풍경에 주목했다. 자동차 한 대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할 비좁은 골목길을. 강남좌파나 된장진보들이 서울시내의 고급 갤러리에서 열리는 사진전에서나 구경할 그 골목길을. 가난한 동네에서는 방범등이 나가도 제때에 갈아 끼우지 않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치안서비스는 극심하게 양극화된 상황이다. 조명 빵빵하게 들어오는 대학교 연구실과 커다란 세미나실에서 죽치고 앉아 입만 나불거리는 유복한 진보지식인들이 보안등 꺼진 골목길의 무서움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 그들이 서민층에서 cctv 대량 설치 찬성여론이 비등한 현실을 이해할 턱이 없을 터. 목숨 있고 프라이버시 있지, 프라이버시 있고 목숨 있는 게 아닌데.
얼마 전 지인한테서 의미심장한 후일담을 전해 들었다. 이명박이 일산초등생 납치사건 수사를 독려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를 방문하자마자 한나라당 지지율이 상당히 올랐다는 거였다.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이를 쇼라고 맹렬히 비판한 바 있다. 진보세력의 무능이 또다시 드러나는 계기였다. 진보좌파는 치안에는 등신이고 국방에는 머저리라는 서민대중의 인식이 재차 확인되었으니까. 전여옥의 노숙자 정리 공약은 그녀에게 상당한 숫자의 표를 안겨줬으리라. 심야의 지하도에서 술에 취한 노숙자와 마주치는 부녀자들 입장에서 전여옥의 발언은 듣기에 솔깃한 얘기였다. 이는 전여옥 개인에 대한 호불호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안이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당분간, 어쩌면 항구적으로 희망이 없다. 정치적 진출의 측면에서는 더욱더. 정치의 abc에 무지하기에. 현대 대중정치의 기본은 다수를 모으는 것이지만, 우리네 진보들은 소수자 옹호에만 주안점을 둔다.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을 보고서 찍어줄 마음이 싹 가시더라. 어디에서 그렇게 특이한 인물들만 뽑아오는지. 진보신당 사람들 눈에는 동성애의 동자도 모르는 수많은 식당아줌마들과 가사도우미들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수다한 인구가 거주하는 공동체에서 질서와 규율은 사회의 통합과 발전에 필수적인 씨줄과 날줄이다. 작은 질서와 규율이 모여 커다란 질서와 규율을 구성한다. 미시적 질서와 규율을 깔보고 무시하면서 거시적 질서와 규율만 추구하니 약발이 먹힐 리가 없다. 도서관에서 함부로 소란 피우는 청소년들이나, 삼성사태의 몸통들이나 잘못된 학습효과가 탄생시킨 시대의 개망나니들이다. 질서와 규율은 불편한 것이라는. 지키는 쪽만 오히려 손해라는.
국민에게 안정감을 선사하는 일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동등한 기반 위에서 경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의 하나다. ‘능력 대 능력’의 구도에서 충분한 승산이 있는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좌파는 무질서를 자유로, 무규율을 평등으로 혼동하는 바람에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럼에도 대중의 물질적 욕망만큼은 무지막지하게 비판한다. 보시라. 질서와 규율이 사라진 곳에서 돈과 재산밖에 믿을 구석이 또 있겠나? 돈과 재산 말고도 의지할 게 많다는 든든한 믿음을 유권자들에게 심어주지 못하는 이상 대한민국의 진보개혁진영에 미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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