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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법원장 街人 김병로[ 金炳魯 ]
굽힐줄 모르는 항일투사이자 참 법조인의 영원한 師表!
 
편집부 기사입력 :  2009/03/1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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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초대 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김병로는 교육자요, 법학자요, 정치가요, 애국자였다.  교육가로서는 30세 때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 강의를 맡아 인재 양성에 노력했던 일이요, 법학자로서는 법학을 전공하여 33세 때 변호사가 되어 조선변호사 회장과 변호사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항일 인사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고 구제했던 일이다."

  그 중에서도 잘 스케치한 부분은 법학자 또는 법조인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초대 대법원장으로 소임을 집행했을 때나 그 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나, 그가 타계한 후에도 그의 행적이 사뭇 존경스럽게 남아있어 현재까지도 모든 이의 가슴에 살아있는 귀감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12월 15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조선조 때 홍문관, 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라고 일컬었던 사간원의 간원이었다.  부친의 벼슬이 간원인 관계로 김병로는 어린 시절에 주로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 영향으로 일찍이 그는 한문을 익힐 수 있었다.

  8세 때에는 독서당에서 동몽선습과 사서삼경에 이르는 한문을 배웠다.  이런 김병로를 가리켜 동네에서는 신동이라고 불렀다.  13세 때에는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전에는 조부와 부친의 상(喪)으로 나이에 비하여 가혹한 고독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17세가 되어서는 한말 유교학자로 대가인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 미처 못 배운 학문을 마저 익힐 수 있었다.  이 무렵 김병로는 개항지로 한창 전성기를 맞이한 목포의 일신학교에 가서 그때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신학문인 영어며, 수학이며, 세계역사 등을 배우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공포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배우던 신학문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나라가 망해 가는데 신학문을 배우면 뭘해."
  나라의 운명이 불길한 방향으로 기울어져가는 데 대한 좌절 때문이었다.  그런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도 용추사(龍湫寺)에서 일본 만행의 규탄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들을 수 있었다.

  "여러분!  을사보호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일본이 강제로 발표한 수탈적 헛소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창이면 죽창, 식칼이면 식칼을 들고나서서 이 땅의 일본놈을 쫓아냅시다."
  이 말에 크게 감명을 받은 김병로는 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에 있는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는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그러고도 망국의 울분과 실의를 도저히 달랠 수 없어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와 <애급망국사(埃及亡國史>만을 행랑에 넣고서 고향을 떠났다.
 
 특히 월남망국사는 중국의 양계초가 저술한 것을 현채(玄采)가 광무 11년(1907)에 번역한 책인데 그 책의 말미에 "조선인의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이다"라는 망국을 암시한 내용이 적혀 있어 당시의 식자들은 그 의미에 대하여 어두운 우려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월남망국사는 일본으로부터 발행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김병로는 가족을 청평에 있는 외가에 의탁시키고 다시 학문을 닦기로 결심하고 창흥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김병로가 법학에 눈을 뜨게 된 동기도 창흥학교의 입학과도 관련이 깊다.  창흥학교 출신들이 동경으로 유학가는 것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병로는 24세의 만학에도 불구하고 동경 유학을 결심하고 무려 5년간에 걸쳐 일본대 전문부법과며, 명치대 법과고등연구과 등에서 법학을 닦았다.

  일본에서 유학과 법학을 한창 익히고 있을 무렵인 1910년에 김병로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한일합방이라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뉴스 때문이었다.  김병로는 유학중에 있는 송진우, 안재홍, 문일평, 신익희 등과 함께 학우회를 이끌며 장차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데 주역이 될 것을 굳게 각오하기도 했다.

  이런 김병로는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하였다.  유학을 떠날 때는 분명히 <대한제국의 조선인>이었으나, 귀국해서 보니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일본의 조선인> 신세가 되고 말았음을 통감할 수가 있었다.  김병로는 귀국 후 경성법전(현 서울대학교 전신)의 조교수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의 강사로 취임하여 그의 전공 과목인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강의 기법으로 후학 배출에 전념을 다했다.  
 
일본의 수탈적 만행을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는 거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무참히 밟혀 가는 인권에 대해서는 더더욱 속수무책이었다.  김병로 스스로 변호사가 될 것을 결심한 까닭도 바로 그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김병로는 변호사의 자격을 얻기 위하여 먼저 판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일정기간 지방판사를 지내게 되면 변호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김병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1918년 부산지법과 밀양지법 판사를 지내기로 했다.  이윽고, 변호사가 된 김병로는 그 이듬해 경성 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을 하게 되었다.
 
 변호사가 되고 보니 막혔던 숨구멍이 조금 터진 듯했다.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다가 일본인한테 붙잡혀 그 깊고 어두운 질곡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애국자들을 위하여 주어진 자격으로 변호하며 건져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김병로는 3·1운동 이후 변호사로 기반을 탄탄히 다지기 시작했다.  사회부터 소외당해왔던 백정들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는 일을 비롯해서, 소작쟁의(小作爭議)며, 노동쟁의 등에 적극 앞장섰는가 하면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조직하여 보다 많은 무료 변호에 보람을 갖기도 했다.  
 
1926년 6·10만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김병로는 항일 애국자들을 위하여 서슴없이 무료 변호에 나섰다.  이 사건의 주동 인물로는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외 11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공판정에서 일본인 판사 에토오(江蘇逸夫)가 <조선민족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으로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혀진 종이를 내밀며"이것은 누가 보아도 일본제국을 모독하는 명백한 불온문서이므로 그 죄의 여지가 충분하다."라고 하자, 박하균이 서슴없이"조선독립문서가 불온문서라니, 판사의 자질이 의심스럽소!"하며, 반격하는 바람에 사건이 더 크게 확대되어 그 형량이 높아질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때 김병로가 헌신적이고 논리정연한 변호를 함으로써 에토오 판사를 주눅 들도록 하여 박하균의 형량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 때는 광주 학생사건 진상조사단을 조직하여 현지에 내려가 광주 서중학교장과 광주서장을 차례대로 방문한 다음 일본인 광주지방 검사장을 만나 정면 항의를 하였다. "일본인 학생은 전부 석방하고 조선인 학생 열 여섯 명은 입건한 처사는 부당하니 당장 석방 조치하시오!"
  
김병로의 이런 항의는 광주사건 공판이 열렸던 광주지법에서도 당당히 재현되었다.  김병로의 행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신간회일 것이다.  신간회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학생운동, 소비조합운동, 노동운동 등을 과감히 전개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신간회의 활동은 날로 활발하여 급기야는 그 투쟁정신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자 일본은 신간회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신간호에 대한 탄압도 만만치 않았다. 
  

 <지방에 있어서의 배일선인(排日鮮人)주의자, 지도자 중 상당 저명한 인물은 거의 신간회에 가입되었고, 또 집회·회원 권유시 등의 언동을 종합해 볼 때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다는 것을 용이하게 알 수 있음(이하생략).>
 
 
  이 글은 일본 고등경찰이 기록했던 당시 신간회에 대한 요사의 일부분이다.  이 요사만 훑어보아도 일본의 눈에 비친 신간회의 평가와 그 이후의 탄압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병로가 신간회를 이끌어오는 동안 그의 집에는 연일 신간회 동지들이 수십명씩 기식하다시피 하였는데, 신간회를 이끈지 1년만에 50칸짜리 가옥을 팔아 인근 설렁탕집 외상값을 갚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김병로는 장덕수, 조병옥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5척 단구에 대쪽같은 김병로의 성품으로 보아 그는 정치인이나 정당인이 될 인물은 아니었다.  해방된 지 3년이 되던 해인 1948년 5월 유엔 감시하에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두 달 후인 7월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국회에 통과시켜 하마터면 잃어버렸을뻔 했던 한국인의 자존심을 당당히 내세울 수가 있었다.  
 
헌법 공포, 정부조직법 공포,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초대 대법원장에 김병로를 인준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대법원장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 못지 않게 김병로에게도 충격적인 비극이나 다름없었다.  김병로는 6·25가 터지기 얼마전에 지병으로 불편을 겪어온 한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하는 수술을 받았었다.  의족으로 그 다리를 지탱해야 되는 처지가 되었는데, 김병로는 맞추어 놓은 의족을 미처 끼어 보지도 못한 채 그의 장손 원규만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9·28수복 소식이 전해지고 한 열흘쯤 지나서 피난지인 부산에 비보가 전해 왔다.  부인 정씨가 친정에서 공비들의 손에 의하여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50여 년의 고락을 같이 해온 부인의 장례마저도 가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그 이상 비극이 어디 있을까. 
 
 김병로는 1953년에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1957년 12월 16일 66세로 정년 퇴임을 하였다.  대법원장 퇴임식날 김병로는 다음과 같은 이임사를 남겼다.
  "그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은 전국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도록 무리한 요구를 한 일들이다.  인권옹호를 위하여 사건처리의 신속을 강조하였던 점과 또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가지고 법만을 위해 살으라고 했던 점이다.  나는 전 사법종사자들이 정의를 위하다가 굶어 죽으면 그것을 곧 영광으로 알라고 했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수만 배 명예롭기 때문이었다."

  의족을 짚은 가인 김병로, 9년 동안 초대 대법원장으로 있으면서 살아있는 법전이라는 별명과 함께 법조인들에게 청렴 정신과 법 처리의 정의 정신을 뼈아프게 심어 준 선구자였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을 앓다가 7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최초의 한국인 대법원장 김병로는 지금도 한국의 법 정신이 더 눈부시게 빛날 것만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글쓴이 송 명(宋明)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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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호는 가인(街人)이다.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울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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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아버지는 사간원정언 김상희(金相熹)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이다.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에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그해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시대에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 즉, 1923년 허헌(許憲)·김용무(金用茂)·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변호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는데,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도 했다. 10여년 동안 그가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학생사건, 6·10만세운동, 정의부·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다. 한편 1927년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사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1945년 9월 21일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구성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재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 퇴임하였다.
 
 
정년 퇴임 뒤에도 재야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그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허정(許政)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1964년 1월 13일 간장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으며,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편집] 권력견제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에 대한 견해차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승만(李承?)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과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는 곧잘 부딪쳤다. 우남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말을 못 알아듣자 우남은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3] 이승만이 1956년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4]

[편집] 1차 사법파동

김병로는 정치 권력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의 국보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5]
 
1952년 부산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명제였다. 한국전쟁 때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세태의 변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곧은 절개는 후인들에게 깊은 감명과 교훈을 주고 있다.

[편집] 가족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평(金汶枰, 1905년 - ?)이 김병로의 사위이고[6] 윤영철 헌법재판소장[7]은 손녀 사위이다.

[편집] 기타사항

남북 분단에 맞서 좌우 합작을 추진했고, 토지개혁을 외쳤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사사오입 개헌의 불법성을 역설하고, 보안법 개악에 반대했다.
2001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선생의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8]
 
한국법조삼성(三聖)기념사업회(상임공동대표 이치백.李治白)는 1999년 12월 3일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선생과 서울고검장을 지낸 화강(華剛) 최대교(1901∼1992)선생, 서울고법원장을 지낸 김홍섭(1915∼1965)선생의 동상 제막식 가졌다.[9]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굶어서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그는 사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행정의 제반사를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 가인은 가구조차 없이 살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켰다.[10]
 
법조계에선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모범적인 표상」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전 임
초대
제1대 대법원장
1948년 8월 - 1957년 12월
후 임
조용순

[편집] 참고자료

  • 《한국의 명가(韓國의 名家)》(一志社, 1976)
  • 《한국근대인물백선(韓國近代人物百選)》(東亞日報社, 1979)
  • 《역대위인실록 하(歷代偉人實錄 下)》(敎育週報社, 1983)
  • 《가인 김병로 평전 : 민족주의적 법률가, 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민음사, 2001)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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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해방공간의 주역:11) 해방공간의 주역

2006/05/31 23:05



복사 http://blog.naver.com/amadacy2004/70004723299




미군정의 남한통치 3년사를 되돌이켜 볼 때 매우 중요했던 첫번째 전환으로 46년 5월에 취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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