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왼쪽부터 정조 초상, 심환지 초상 :한겨레신문 | |
“요사이 벽파(僻派)가 (인사에서)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는데…그 이해득실은 어떠한가?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대목의 원문은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라고 되어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뒤죽박죽’을 썼을 가능성도 있으며, 격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그 자신의 성품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799년 11월24일 아침에 보낸 편지에는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라고 썼다.
◇신하와 ’짜고 한’ 정치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교수는 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를 평하기를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보다는 국왕지지 세력조차도 당혹스러워 할 정도로 기만과 독단을 자주 사용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비밀편지는 정조의 이런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에 의하면 정조는 심환지와 은밀한 방법으로 서찰을 교환하며 당대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했으며, 특히 심환지를 통해 노론 벽파계 인물들을 통제하려 했고, 주요 인사 문제를 협의하고 국정운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심환지와 각본에 의한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심환지를 예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한 과정이 이에 해당한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1798년(정조 22) 7월14일에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8월28일에는 우의정에 승진 발령했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심환지가 이렇게 등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번 어찰을 보면 이런 인사조치가 있기까지 정조와 심환지는 수많은 비밀편지를 교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내가 언제 너를 예조판서, 혹은 우의정에 임명할 터이니 너는 이렇게 준비하고 행동하라’는 지침을 사전에 내린 것이다.
나아가 정조실록에는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으로 나온다.
한데 이번 비밀 어찰을 통해 이 또한 정조와 심환지가 미리 각본을 짜고 벌인 일종의 ’정치 쇼’였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1798년 9월18일,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심환지에게 첫 번째 사직상소를 언제 낼 것인지를 물었으며, 그에 대한 답변과 사직상소 문안이 도착하자 “사흘 후(9월24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사직상소 문안도 직접 손을 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편지들 중 하나에는 심지어 “내일 어전 회의에서 이런 사안을 논의할 터이니, 심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 놓으면 내가 승인하겠다”고 입을 맞추는 내용도 있다.
◇정조 독살설의 진실
1800년(정조 24) 1월17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릉원(顯隆園)을 찾았다. 그 자신에게는 마지막 현릉원 방문인 이날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둘러보다가 설움이 북받쳐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면서 통곡했다.
신하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두 사람이 정조 좌우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 사람이 좌의정 심환지였고 다른 사람은 우의정 이시우(李時秀)였다.
심환지 또한 함께 통곡하면서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下敎)를 하십니까? 마음을 졸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들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도 없지만, 오르내리시는 영혼께 걱정을 끼쳐 드림은 생각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정조의 하교는 자신의 죽음 뒤에 해야 할 일을 담았다. 이로 보아 정조는 이미 이 무렵에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5개월 가량이 지난 1800년 6월28일 정조는 타계했다.
이 날짜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새로 승지에 임명한 김조순(金祖淳) 등을 접견하다가 병세가 위중해졌고, 심환지가 다시 만났을 때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심환지가 정조의 입에다가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약물 일종), 인삼차, 청심환(淸心元)을 넣어주려 했지만 정조는 전혀 삼키지를 못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심환지는 정조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고, 나아가 정조가 죽을 때 그 옆에서 약을 들도록 했다는 이 기록에 주목해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정조의 비밀편지들은 심환지가 정조의 정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그의 심복이었음을 입증한다.
나아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 자신의 편지에는 정조가 말년에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정조는 이미 말년이 되면 돋보기 안경을 쓰고도 글을 읽지 못할 정도였으며, 곽란이나 다른 병으로 며칠 동안 앓아눕는 일이 더러 있었다.
죽기 두 달 전인 4월17일자 편지에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갑자기 눈꼽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꼽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중략) 번갈아 (온몸이)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사망 13일 전에 쓴 편지는 더욱 악화한 병증을 호소한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 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體貌)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 주었다. 올 한 해 동안 황근(黃連)을 1근 가까이나 먹었다.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 이만 줄인다.”
그의 병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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