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편집  2024.10.14 [20:00]
고대사/근현대사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4천리 화려강산
탐라에서 간도까지 4천리를 대한국 영토로 인식한 고종황제
 
김민수 기사입력 :  2008/12/26 [22:1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탐라에서 간도까지 4천리를 대한국 영토로 인식한 고종황제


▲ 대한제국 광무 고종황제

관련기사
일본과 친일파들이 숨기고 있는 대한제국의 진실
되찾아야 할 우리땅 간도(間島)
철갑선을 타고 나타난 외계인들
고종 “을사늑약 부당” 첫 외교문서 발견
"고궁에서 노래자랑 이라니, 1인시위라도 하겠다!"
경운궁 석조전에서 대한제국과 독도 특별전해야
오호, 痛哉! ~哀哉 哀哉라! 숭례문이여!! 남대문이여!!!
사대의 승리 통곡의 역사...
김 옥균과 전 봉준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대한국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은 12일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고종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일제가 훼손하기 이전의 환구단의 원래 모습:지금도 조선호텔 뒷편에 일부가 남아있다.편집부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삼대(三代)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대한(大韓)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우리나라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원래의 삼한(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다.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한 후 경운궁으로 환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이어 낮 12시에 황후를 책봉하고 오후 2시에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짐(朕)이 생각건대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이다. 태조(太祖)께서 용흥하는 처음에 여도(輿圖)로써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만주,연해주)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국(耽羅國: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풍부한 여러 해산물을 공(貢)하는 지라. 폭원이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거늘 오직 짐이 부덕(不德)하여 여러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상제(上帝)께서 돌아보시어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시니, 금년 9월 17일(양력 10월 12일)에 백악(白嶽 북악산)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 고종황제 즉위식 경축 행렬


1904년 2월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독점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1909년 만주침략과 이권 장악을 위해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    고종황제 즉위식 경축 군악대 행렬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커피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대안문 앞,기념비전 앞 전국적인 규모의 '3·1 독립만세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양위를 당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 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신한혁명단'에서 고종황제를 망명시켜서 항일운동을 활성화 할 계획도 드러났고, 더구나 고종황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   양복 차림의 고종황제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후 4월 10일 상해에서 교포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대한민국(大韓民國)」의 탄생을 보았다.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제1조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2일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를 선출했다.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하였다.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같은 시기에 경성에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단일정부 수립 열망이 높아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1926년 말 구성된 김구 내각은 1927년 3차 개헌을 통해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고, 1940년 9월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주석 김구(金九)·내무 조완구(趙琬九)·외무 조소앙(趙素昻)·군무 조성환(曺成煥)·법무 박찬익(朴贊翊)·재무 이시영(李始榮)·비서장 차이석(車利錫)으로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1944년 국무위원회와 행정각부를 이중구조로 개편했다.



국무위원은 김구(주석)·김규식(부주석) 외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이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김성숙·조경한 등 14명이었고,행정각부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내무)·최동오(법무)·최석순(문화)·엄항섭(선전)으로 구성되었다.1919년 고종황제 붕어, 3·1독립만세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 주권재민의 근대국민국가를 지향하고 국체(國體)는 대한제국 계승을 표방하였다.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18일 발매된 시사 월간지 신동아는 만주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유럽 고(古)지도가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관장, 김혜정교수)은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집안, 간도지역이 조선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신동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이 한반도 이북 지역에서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서양 지도가 이처럼 대량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습니다.

신동아로 부터 사진과 기사를 제공받아 도깨비 뉴스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당빌리는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1801년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가 제작한 ‘A NEW MAP OF CHINA’.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1740년 예수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 제작한‘La CHINE avec la KOREE et les Parties de la TARTARIE’ 지도.

 

1771년, ‘본 도법’으로 유명한 지리학자 본이 제작한‘CARTE DE LA TARTARIE CHINOISE’ 지도.

 


1778년 잔비어(Janvier, j. & Santini, F) 등이 제작한 ‘L、ASIE divisee en ses principaux Etats’아시아 지도.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된 것으로 나온다. 한국을 녹색 테로 둘러 ‘COREE’라고 표기했으며 동해는 ‘MER DE COREE’로 표기했다.

 

1794년 윌킨슨(R. Wilkinson)이 제작한 ‘CHINA, Drawn from the Latest & Best AUTHORITIES’ 지도.

 


1920년 로마교황청이 작성한 교구도.  원본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한반도를 서울, 대구, 원산의 3개 교구로 나눴는데, 간도 지역이 ‘원산(Wonsan) 교구’에  포함돼 있어 간도와 한반도가  동일 생활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9년 일본 조선통감부  임시 간도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 답사도’.  백두산(검정색 원) 정계비는“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압록강-토문강으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도는 토문강(土門江·갈색 원)과 두만강(豆滿江·청색 원)은 다른 강이며,  두만강 이북에 토문강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간도협약 100주년 이전에 한국 영유권 국제사회에 고증해야”

 

오는3월 문을 여는 경희대 수원캠퍼스 내 혜정박물관은 600여점의 동·서양 고(古)지도를 고루 갖췄다. 모두 김혜정(金惠靜·58) 박물관 관장이 수집한 것들로, 이중엔 주목할 만한 지도들이 있다.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집안 및 간도 지역을 조선이 관할했음을 보여주는 서양 고지도 69점이 그것이다. 모두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지도들이다.

그간 국내 학자들이 간도가 조선 영토였음을 보여주는 옛 지도들을 간헐적으로 알려왔지만, 대량으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지도들은 당시 동아시아 국경 문제를 중립적으로 바라본 서양 지리학자들이 제작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김혜정 관장은 “이번 지도 공개를 계기로 간도 영유권 논란에 대해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간도 문제는 ‘잃어버린 한국 근대사’의 참모습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박물관의 전시품 보관창고에는 칸마다 고지도와 관련 사료들로 꽉 차 있다. 한 사람이 이를 모두 채우기란 쉽지 않았을 듯싶다. 김 관장에게 지도를 수집한 경위를 물어봤다.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경비도 수십억원 들었죠. 중국만 60여 차례 방문했고, 일본과 유럽도 해마다 들렀습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서점, 골동품가게 등으로 한국이 표기된 동·서양 고지도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시대별로 빠짐없이 지도를 수집했는데, 모두 원본입니다. 세계적으로도 혜정박물관은 서양 고지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기관 중 하나입니다. 특히 한국이 표기된 서양 고지도는 거의 대부분 수집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김 관장은 “그처럼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 수집할 정도로 고지도가 매력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서양 고지도는 객관적 증거물”
“기능을 강조하는 요즘 지도와 달리 옛 지도는 우선 아름답습니다. 색채,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지도엔 국가와 민족의 뿌리가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최근 미국 의회는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최초로 표기된 16세기 세계지도 한 장을 구입하기 위해 1700만달러를 제시했지만, 지도를 가진 독일인은 판매를 거절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메리카’를 국명으로 사용하는 나라가 최초의 ‘아메리카’ 표기 지도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그것의 상징적 의미가 달라지지요. 지도의 보유 여부는 때로는 국가의 자존심과도 결부되는 사안입니다. 또한 지도는 당대를 살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이죠.”

2년여 전 김혜정 관장은 일을 한번 낸 적이 있다. 동해 표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간에 논란이 일었을 때 동해를 ‘동해’ ‘한국해’ ‘고려해’ ‘조선해’ 등으로 표기한 서양 고지도 50여 점을 일시에 공개, 전시한 것.

“객관적 증거자료를 제시하면서 국제사회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기엔 서양 고지도만한 게 없죠. 당시 고지도 전시장을 둘러본 일본 수학여행단 학생들은 문화충격에 빠졌습니다.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이 절대로 옳다고 믿던 상식이 절반쯤 깨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구 국가들이 동해 표기를 병기하는 것은 한국의 국력이 커진 탓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서양 고지도를 발굴한 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보기엔 자신들의 선조가 만든 수많은 지도가 ‘동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30년간 전세계 돌며 ‘간도는 조선’ 입증하는 서양 고지도 구입
●18세기 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은 조선인 생활권
●중국 논리 뒤집는 ‘두만강·토문강 별도 표기’ 지도
●서구 유명 지리학자들이 측량, 중국 황제도 지도제작 지원


“현 ‘조선족자치주’는 실제 조선땅”
고지도가 가진 ‘증거물’로서의 가치는 간도 영유권 논란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김 관장의 주장이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한 백두산정계비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삼는다’고 적혀 있는데, 중국은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며 간도 영유권 논란을 일축한다.

반면 한국 사학계는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쪽의 만주로 흐르는 강으로, 두만강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측 고증에 따르면 토문강이 국경이 될 경우 현재 중국 조선족자치주(남한 면적의 3분의 2)의 상당 부분이 조선의 영토였음이 인정된다. 이와 관련, 김혜정 관장은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도 표기한 조선통감부의 미공개 지도 원본을 이번에 새로 공개했다.

1909년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했다. 이에 대해서도 한국 학계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보호조약이 고종 황제의 위임장이 없는 등 국제법상 무효이므로, 이를 근거로 한 국가간 외교조약인 간도협약도 무효”라는 주장을 편다.

김혜정 관장이 이번에 공개하는 69점의 간도 관련 서양 고지도는 18세기 이후 간도, 집안 지역이 조선의 영토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혜정박물관의 오일환 박사(역사학)는 간도 관련 서양 고지도의 제작경위와 지도상의 영토 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혜정박물관이 확보한 지도들은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인 당빌리, 영국 지리학자 존 케리, 본 도법(圖法)으로 유명한 프랑스 지리학자 본, 윌킨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서양 지리학자들이 1700년대 중반 동아시아 일대를 표기한 지도들로, 모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일부 지역을 조선의 관할권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백두산정계비로 조선-청나라 국경이 확정(1712)된 이후 제작된 것입니다.

당빌리를 비롯 서구 지리학자들은 강희제(康熙帝) 등 청나라 정부의 지원으로 측량한 뒤 지도를 제작한 것이어서 중국측 주장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69점에 이르는 당시의 서양 지도는 조선-청나라 국경이 만주에서 형성됐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역은 조선 함경도 관할로 돼 있습니다. 압록강 이북 집안지역도 조선 평안도의 일부로 돼 있고요. 청나라가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자국민인 한족(漢族)의 통행을 제한한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이 사실상 조선인들의 생활무대였음을 당시 서양 지리학자들과 중국인들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 지리학자들은 한반도가 중국-일본 간 전면 전쟁의 무대가 된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지도에 정교하게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만주국이 패망한 1945년 이후 60년간 실효적으로 중국이 간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데다, 간도와 접경한 한반도 북부에 주권이 미치지 못해서 한국은 그동안 간도 영유권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김혜정 관장은 “그러나 2004년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이른바 ‘동북공정’을 전개한 것은 한국에게 한반도 주변 고대사(고구려사)와 근현대사(간도영유권)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구명해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고구려사 문제와 간도 영유권 논란의 사실관계를 밝혀 국내외에 알리는 일에 당사자인 한국이 적극 나서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된 간도 자료
지난해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간도 영유권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해온 한국 정부로선 진일보한 변화였다. 이런 발언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김혜정 관장은 반기문 장관이 이 발언을 하기 며칠 전, 반 장관에게 간도 지역이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서양 고지도들과 사료들을 전달하면서 간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간도협약은 2009년이면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김혜정 관장은 “이젠 간도 영유권 문제를 덮어둘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가간 조약(간도협약)은 100년이 지나면 문제를 제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전에 간도지역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이슈로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관장은 “간도 영유권에 대한 구체적인 고증을 지금부터라도 해야 한다. 간도는 한-중 간 영유권 논란 지역”이라고 말했다.


기사제공= 신동아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사진제공= 경희대 박물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