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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앞에 서면 작아지는 일그러진 군상들
▶인권.환경단체 북한의 열악한 인권과 탈북자 강제송환등 외면▶ 원전 반대 시위 하면서도 북한 핵실험에는 침묵
 
중앙일보 기사입력 :  2017/09/2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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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기자 사진 이영종 중앙일보 데스크 lee.youngjong@joongang.co.kr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북한 앞에 서면 작아지는 일그러진 군상들

중앙일보 2017.09.27 01:00
 
평양발 전운이 심상치 않다. ‘서울 핵 불바다’에 이어 태평양상 수소탄 실험을 위협하더니 그제는 외무상까지 ‘선전포고’ 운운하며 도발행보에 가세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선 김정은과 그 핵심 추종세력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심지어 그가 대단한 세계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양 치켜세우거나 마지못해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 서로 말폭탄’ 같은 물타기식 양비론에 머문다. 북한 앞에만 서면 유난히 작아지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제시해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기 6개월 전인 2010년 3월 초 서울의 어느 조찬 강연장. 베테랑 외교관 출신 인사의 기조연설 초반부터 좌중이 술렁였다. 노무현 정부 때 요직을 거쳐 이명박(MB) 대통령 취임과 함께 외교안보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를 맡은 이 연사의 발언이 문제였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건강을 회복하고… 후계자로 내정되신 분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권력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정일에게 깍듯한 존칭을 쓰고 김정은에게까지 ‘후계자로 내정되신 분’이란 표현을 써 논란이 일자 그는 “그분이 한 국가를 다스리는 분이라 예의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를 통해 그는 ‘매너 있고 경우 바른’ 외교관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3대 세습을 강행한 북한 정권에 대한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판적 인식과는 큰 거리 차가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보수적 성향을 보인 MB 정부는 대북 이슈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다. 전대미문의 북한 3대 세습이 한창 벌어지는데도 핵심 관료들은 그 심각성을 몰랐다. 비판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에 양탄자를 깔아준 셈이다. 조선노동당 3차 대표자회(2010년 9월)에서 후계자에 오른 김정은은 이듬해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전권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집권 6년 만에 한반도 평화와 국제사회의 안정을 뒤흔드는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등장했다. 독재권력 세습을 끊어버리거나 견제·약화시킬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후과(後果)다.
 
이처럼 북한 체제와 최고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꺼리거나 은근히 감싸는 듯한 우리 사회 일각의 분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전·현직 대통령과 외국 국가원수 등에게는 존칭을 쓰지 않다가도 북한 김정은에게는 빼놓지 않고 ‘노동당 위원장’이란 직책을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직함을 알리는 차원에서 한두 차례 정도면 충분한데도 말이다.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를 ‘리설주’로 표기하고, 노동신문을 ‘로동신문’이라고 써야 북한을 좀 아는 거란 착각이 학계와 언론 등에 만연하다. 남북 간 국어(북한은 조선말) 표기법에 대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잠정적으로 각기 표기 방식대로 쓰기로 한 남북 합의와 그간의 관례는 묻혀버렸다.
 
진보연(然)하는 인권운동가들과 환경단체도 북한에 눈감는 건 마찬가지다. 사소한 인권 침해와 갑질 행태에 감시의 눈길을 놓지 않으면서 탈북자 강제북송이나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아닌 보살한다. 세상에 어느 진보가 이 같은 폭압정권에 시달리는 동포를 방기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원전 폐기와 반핵을 주장해온 환경단체도 그렇다. 북한이 여섯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자행하고, 풍계리 현장에선 방사능 누출로 인한 지하수 오염과 붕괴·지진 등의 징후가 잇따르는데도 규탄성명이나 시위 한 번 없다. 천성산 도롱뇽과 제주도 강정마을의 구럼비보다 한반도 환경생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 사안인데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피해 호소와 핵실험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건 중국 동북 3성 지역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이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북한이 ‘최고 존엄’ 운운하며 김정은 비판 목소리를 옥죄고 나서자 주눅 든 모습까지 보인다. 지난달 말에는 북한이 체제 비판한 번역서를 신간 소개란에 쓴 우리 언론의 문화 담당 기자 2명과 해당 신문사 대표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며 즉각 처단을 위협하기도 했다. 북한이 중앙재판소까지 내세운 유령 궐석재판을 벌여 우리 언론인에게 살해 위협을 가했는데도 정부는 제대로 된 항변조차 못했다. 언론자유 수호를 제일 가치로 표방하는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도 마찬가지다. 
 

정부 대북부처도 미덥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4년째 수감생활 중인 선교사 김정욱씨를 비롯해 6명의 대한민국 국민 억류사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책이 없다. 9억3060만 달러(약 1조521억원)의 대북 식량차관을 떼일 판인데도 상환 촉구는 미적거린다. 북한이 청구서를 수령하지 않는다며 볼멘소리에 그친 것이다. 핵·미사일 도발로 국민 여론은 부글거리는데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지원 결정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비판을 자초했다.
 
우리 국가원수에 대한 비방과 폄훼(貶毁), 국민을 상대로 한 위협이 도를 넘었는데도 대응은 안이해 보인다. 유엔 총회에 참석했던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25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미 전략폭격기가 영공을 침범하지 않아도 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이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는 억지다. 이용호의 말대로라면 북한은 그간 무수한 대남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대남 특수부대의 청와대·연평도 타격 훈련장을 찾은 김정은이 직접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 서울을 타고 앉으라”는 등의 극단적 발언을 쏟아내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핵심 관료와 정부부처 구성원의 주류는 민주화운동과 진보 사회활동 경험을 갖고 있다. 민주와 인권·자유·평화를 최고 가치로 삼는 걸로 알려져 있다. 대북 문제에서도 제재보다 대화에 무게를 싣고, 인도 지원이나 경협·교류에 열린 마음을 보여왔다. 하지만 그들이 집권세력으로 맞닥트린 ‘북한’이란 현실은 녹록지 않다. 누구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정권의 실체적 진실을 목도하고 많이 번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 본색이 드러나면서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박정희 대통령 18년 장기 집권과 전두환 시대를 건너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까지 무너트린 우리 사회의 민주화세력이 북한의 70년 노동당 독재통치가 영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미망(迷妄)이다. 젊은 시절 권위주의 체제에 억눌린 헛헛한 마음을 현혹시킨 주사파류의 노폐물만 걷어낸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민족의 운명을 농단하는 김정은의 군사 모험주의 노선에 견결한 비판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 북한 동포의 인권 회복과 민주화를 위해 서둘러 머리를 맞대길 권한다. 혹여 하는 기대에 어물쩍거리기엔 임기 5년은 너무 짧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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