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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다 죽이고 일본인 이주시켜라" 히데요시 지시로 호남 대학살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8>8화: 빼앗긴 호남..계획된 살육
 
동아일보 기사입력 :  2017/08/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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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다 죽이고 일본인 이주시켜라" 히데요시 지시로 호남 대학살
 
입력 2017.08.26. 03:01 수정 2017.08.26. 11:32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8>
8화: 빼앗긴 호남..계획된 살육

[동아일보]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8화: 빼앗긴 호남…계획된 살육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기술한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는 조선에서의 전쟁 참상이 삽화와 함께 상세히 묘사돼 있다. 다케우치 가쿠사이가 글을 쓰고 오카다 교쿠잔이 그림을 그린 이 책은 1797년부터 1802년까지 7편84책이 발행됐다. 위 그림은 왜군과 전쟁 당시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고, 길을 가다가 이를 목격한 명나라 장군과 병사들(왼쪽)이 슬퍼하는 장면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촬영

1597년 8월 호남의 관문 남원성마저 함락되자 조선과 명나라의 민심이 요동쳤다. 남원성 전투에서 3000명의 병력을 순식간에 잃은 명나라는 조선 못지않게 충격이 컸다. 전황을 전해들은 저장(浙江), 푸젠(福建), 광둥(廣東) 성 등 중국 동남부 연해안 지역의 중국인들은 피란을 걱정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왜구의 피해를 겪어오면서 왜인들의 야만스러운 행동에 치를 떨곤 했다. 얼마 전 난징(南京)에서는 일본 간첩까지 체포됐던 터였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 신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난징에 도착하니 민심이 불안했다. 지나(China)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돕고 있지만 일본의 공세를 막아 내리라는 희망은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이 만약 지나 본토를 직접 공격한다면 지나는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본토를 방어하기에도 힘겨울 것이다.”(‘利瑪竇中國傳敎史’)

명나라 조정도 당혹감과 위기를 느꼈다. 남원성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명군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파견한 천병(天兵)이라는 대국 이미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뿐 아니라 당장 국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전라도를 중국 수도권과 연결되는 중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의 지리 관념으로는 산둥(山東)반도와 바로 마주한 대안(對岸)이 전라도였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전라도를 지켜야 하고, 그 관문인 남원을 사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經略複國要編’)

그런데 왜군이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성까지 무혈입성함으로써 서해와 호남을 장악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지시만 내리면 왜군이 전라도에서 서해를 건너 산둥반도 혹은 베이징(北京)으로 바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전황이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남원성 전투 이후 왜군과의 전쟁을 조선 구원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국토 방어 전쟁의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는 제독 동일원과 유정, 도독 진린 등 육군과 수군의 장군들을 대거 차출해 조선에 급파하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파병 규모도 당초 계획한 8만 명에서 14만3700명으로 대거 늘렸다. 정유재란은 그야말로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조선도 전라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라도가 없으면, 비록 다른 도가 있어도 나라의 근본을 삼을 데 없다. 이 때문에 왜적은 기어이 빼앗으려 하고, 우리는 꼭 지키려 하는 것이다.”(‘선조실록’)

비겁한 임금, 도망갈 궁리부터

그런 전라도를 장악한 왜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도성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피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조는 내전(內殿·왕비)과 세자 등 자신의 가족부터 피란시킬 방책을 마련하라고 신하들을 채근했다. 선조는 자신의 행동이 비난을 사는 것임을 모르진 않았다.

“늘 나를 겁쟁이로 여기지만 서둘러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선조의 도피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정유재란 발발 전후에도 왜군의 수상쩍은 움직임만 보이면 도주하려 했다. 1596년 11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깨진 후 히데요시가 다시 군사를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는, 황해도 해주 행궁(行宮)에 묻어놓은 왕자의 탯줄(藏胎)을 살펴본다는 명분으로 한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 신하들에게 제지당했었다. 1597년 6월 일본에서 대군이 건너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도피하려 했다. 또 7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전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도 선조는 왕비와 왕자 등을 피신시키려고 했다. 그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다. 하도 신하들이 말리자 선조는 버럭 화를 냈다.

“듣건대 조관(朝官)의 가속(家屬)들이 대부분 도성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내전을 떠나지 못하게 강요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까지 하니,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란 말인가?”(‘선조실록’)

선조로서는 신하된 자들이 자기 가속은 챙기면서 임금 가족을 챙겨주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냉엄하게 간언했다.

“성상(선조)께서는 주야로 궁궐 권속들을 피란시키는 데에만 서두르고 계시니, 천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중국군만 서둘러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할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이로 인하여 꼭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찌 크게 근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가 아침에 후궁을 내보내시면 저녁에는 도성이 텅 비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생각을 못하시는 것입니까.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후궁과 왕자를 먼저 피란시키라는 명을 속히 거두도록 하소서.”(‘선조실록’, 1597년 8월 15일)

왕부터 그러니 현장의 벼슬아치들 행태도 별다를 바 없었다. 사헌부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원이 패몰된 후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의 백성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돼 흩어집니다. 또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直路)의 수백 리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충청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공주(公州)ㆍ이산(尼山)ㆍ은진(恩津) 세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거처를 알 수 없다 하는데, 이처럼 위급한 때에 한 고을을 지키는 신하로서 관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는 생각지도 않고 먼저 도망하여 백성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속히 나국(拿鞫)하여 정죄(定罪)할 것을 명하소서.”(‘선조실록’)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려면 먼저 민심을 수습한 후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이 먼저 도망쳐 버렸으니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호남인의 씨를 말려라”

전북 전주성의 남문인 풍남문. 전주성은 정유재란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성의 대부분이 파괴돼 풍남문만 남아 있는 상태다. 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죽어나가는 건 조선 백성뿐이었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임진왜란 때의 왜군과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확연히 그 행태가 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라는 주인장(朱印狀·붉은 도장으로 사인한 명령서)에서 군사들의 약탈, 난폭, 방화 등 불법적 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납치 등을 하면서도 무자비한 학살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왜군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고 히데요시도 이를 묵인했었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히데요시는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난중잡록’)

히데요시가 자신의 처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의 왜군 총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지시한 말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 자식이 대를 이어서 조선을 굴복시킬 것이니, 장기전을 펼치라고 왜군 장수들에게 주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빈 땅에다 일본 서도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는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군에게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상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할 것이다.”(‘선조실록’)

조선인을 잡아다 일본에서 노동력 착취 등으로 부려먹고, 대신 일본의 일반인들을 병력으로 차출하겠다는 뜻이었다. 히데요시가 집요하게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가 빈 땅을 만들겠다고 지목한 곳이 바로 호남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버틴 것은 조선 수군의 버팀목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호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이긴 후 조선 땅에 상륙하자마자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분탕질을 쳤다. 1597년 8월 보름 남원성에서 조선인 백성 6000여 명을 도륙하기 이전인 8월 3일 왜군은 섬진강 하구의 하동과 구례에 도착하면서부터 살육, 약탈, 방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좌군(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케이넨(慶念)은 자신의 일기(‘朝鮮日日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왜군들이)신속히 선박에서 내려 너도나도 뒤질세라 재물이 있는 사람을 죽이며, 서로 빼앗는 모습은 제대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못도 없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양새였다.”(1597년 8월 4일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칼로 베고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부모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1597년 8월 6일 기록)

“조선 아이들을 잡아서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다시는 만날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의 고문과도 같았다. 애처로운 모자의 이별이 이런 것인가.”(1597년 8월 8일 기록)

왜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오는 도중에도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케이넨은 그 스스로가 일본군을 따라온 종군승이면서도 악귀처럼 사람을 잡아 죽이고, 들과 산을 불 지르는데 혈안인 된 일본 무사들을 보면서 아수라장 같다고 표현했다.

돈 받고 목숨 살려준 왜군

왜군은 군인이 아니라 강도떼에 가까웠다. 이 역시 히데요시가 부추긴 결과였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기피하는 왜군들에게 전쟁은 출세와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라고 선동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선물’을 약속했다. 점령지에서의 포로 사냥, 재물과 식량 약탈, 부녀자 겁탈 등을 무제한 허용했다. 병사들이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히데요시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고 보증까지 섰다.

왜병들은 백성을 도륙하면서 목숨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을 사로잡아 남자에게는 쌀 5두(斗)를 걷고, 부인에게는 쌀 3두를 걷은 후에 면사첩(免死帖)을 주었다.”(‘선조실록’)

케이넨 역시 왜군의 일부 병사가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1597년 8월 16일 기록)

왜군은 전주를 거쳐 공주와 청주, 천안 등지로 북상하는 동안에도 사람 사냥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겨울,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본 뒤 그 실정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본도(전라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이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심되고 참담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선조실록’)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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