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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석조전에서 대한제국과 독도 특별전해야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김민수 기사입력 :  2008/08/0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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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덕수궁) 석조전에서 대한제국과 독도 특별전해야


정부조직법,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문화재 관리,활용 사무를 관장,총괄하는 문화재청은 법적,제도적,행정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으므로 문화부는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인 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을 문화재청으로 이관하여 문화재청의 문화재 관리 정책 총괄,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한다.
 
 
▲  비운의 대한제국 광무 고종황제: 편집부



문화재청은 매장문화재발굴조사법인,국가지정문화재수리업체,문화기관,연구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굴 조사,보수 복원,실측 설계,전시 기획 기능은 완벽하므로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이관받고 고궁박물관(경복궁 본관/경운궁 분관),왕실유적관리소(경운궁 중명전),민속박물관,해양박물관,지방박물관,문화재연구원,한국전통문화학교로 직제개정하여 문화재 관리 정책 연구,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발굴법인,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한다.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왕실문화재 및 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궁박물관은 경운궁 분관을 신설하고 민속박물관은 경기도로 이전하여야 하며 고궁,민속,해양,서울,경주,전주,광주,대구,김해,진주,공주,부여,청주,제주,춘천박물관의 직급,정원을 조정하고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문화재를 이관하여야 하며 문화재는 조직,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문화재 관리 법령을 개정하고 왕실유적관리소를 경운궁에 신설하여야 한다.
▲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문화재는 보존공물로서 사람처럼 멸실,훼손되면 재생이 불가능하므로 소유,지정과 관계없이 공용제한을 받아야 하며 문화재청이 국보급 중요문화재의 관리를 지방자치단체 및 법인,단체에 위임,위탁하는 것은 적법,타당하지 않으므로 문화재청은 국보급 중요문화재를 소속기관으로 이관,귀속하여 중점 보호하여야 하며 무허가 반출,무허가 발굴,무자격 수리,손상,절취,은닉,방화,위조,일수 등 문화재사범의 죄형을 세분화하고 처벌을 강화하여 사전적,예방적,적극적,능동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군용지 강제수용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1905년 2월 대한제국령 독도를 불법 강점하였고 미국과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영국과 8월 영일동맹,러시아와 9월 포츠머스조약을 맺고 한국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은 일제는 11월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을사늑약을 강제하였으며 1909년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 마련과 남만주 이권 장악을 위해 대한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  고종.순종황제와 의친왕 과 황실가족들... 맨왼쪽 칼을 짚고있는분이 의친왕. 중앙의 고종황제 바로 뒤 군복차림의 어린소년이 영친왕이고 맨 오른족 소녀가 덕혜옹주   



일제 통감부,총독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조선총독부,경성제국대학으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연구기관,문화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에서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되었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가 총독부가 수집한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매장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었다.

대한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구황실사무청,구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전적 고문서 미술품을 중점보호하고 경운궁 중명전 선원전 흥덕전 흥복전 의효전 인화문 경복궁 광화문 서십자각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경농재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별궁 행궁 의정부 승정원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규장각 소격서 종친부 한성부 중추부 의금부 삼군부 춘추관 성균관 육조 돈의문 숭례문을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    양복차림의 고종황제: 편집부



문화재청은 제국주의 국가로 불법 반출 후 환수 또는 교육연구기관·정부기록기관·연구문화기관이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지도·옥새 등 왕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왕실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왕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국내외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왕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
이다. 1919년 촬영.


 
필자주: 원래 이름이 경운궁이었던 덕수궁 석조전은 구 한말 궁궐내의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서 아관파천(1896년) 이후 환궁한 고종황제가  친일매국노의 독살로 붕어(御)하실때까지 머물던곳으로 이곳에서 근대적 국제법에 입각한 대한제국 황제 칙령41호를 선포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만방에 선포한 곳으로 각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궁궐이다.

 
▲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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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조회(104) / 추천 / 퍼가기
등록일 : 2008-07-16 12:03:11

‘석도(石島)는 독도(獨島)’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 yhshin@kimkoo.or.kr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는 石島가 獨島임을 증명
‘울도군 행정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 포함’ 명시
우산도=독섬=石島=獨島=리앙쿠르島
日 정부, 1905년 이전에 두 차례 ‘독도는 한국영토’ 인정
1905년 ‘無主地’ 주장은 고의적 침탈…완전무효

 
독도가 한국 고유영토의 일부임이 이미 여러 자료와 사실에 의해 증명됐다. 그럼에도 일본 측은 이를 부정하고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침탈하려는 활동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최근엔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 침탈정책의 하나로 제정한 소위 ‘다케시마의 날’에 맞춰 시마네현 지방신문 ‘山陰中央新報’(2008년 2월22일자)와 ‘죽도문제연구회(竹島問題硏究會)’가 억지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를 사료로 제시하면서 “대한제국 칙령(勅令) 제41호에 의하면 울도군 소관인 석도(石島)는 독도(獨島)라는 주장은 붕괴되며, 따라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일본 외무성도 홈페이지에 ‘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를 3개 국어(한국어·일본어·영어)로 띄우면서 ‘독도가 일본 고유영토’라는 선전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5월에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독도는 일본 고유 영토임을 가르치도록 교사지침서에 이 내용을 넣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중앙정부에선 외무성과 문부과학성, 지방에선 시마네현이 중심이 돼 긴밀히 상호연락하면서 독도 영유권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 일각에서 이것을 일본의 지방정부 문제로 보려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하다.

‘범위’와 ‘거리’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한국 측 사료인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울도군의 배치전말’ 기사에 울도군의 소관 섬은 울릉도와 죽도(竹島, 현재의 죽서도)와 석도(石島)인데 동서 60리, 남북 40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1리는 0.4km이니 동서는 24km, 남북은 16km이다. 현재의 독도(일본명 竹島)는 울릉도 남동 92km로서 숫자가 울도군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한국 측 주장은 붕괴된다는 것이다.  문제의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鬱島郡의 配置顚末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되 江原道 三涉郡 管下 所在 鬱陵島에 所屬 島嶼와 郡廳設始 年月日을 示明라 故로 答函되 光武二年 五月 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하였다가 光武四年 十月 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 所管島 竹島石島오 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얏다더라. 이 기사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 내부에 공문을 보내 울도군에 소속한 도서 이름과 울도군 군청 설치 일자를 질문한 데 대한, 대한제국 내부의 응답 공문을 보도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첫째, 일제 통감부는 울도군에 소속된 도서의 이름과 군청 설치 시일을 질문했지 울도군 ‘소관’의 면적 범위를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본 측이 대한제국 답서의 숫자를 처음부터 ‘범위’로 해석한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억지단정이다.

 
5월29일 독도연구보전협회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은 발굴한 새로운 사료들을 근거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다음은 대한제국 답서 숫자에서 ‘동서가 60리오 남북이 40리니 합 200여리’라고 한 것 가운데 ‘합 200여리’라고 한 부분을 일본 측은 고의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합 200여리’라고 한 것은 ‘거리’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함이 정당하다. 만일 일본 측의 주장처럼 이것을 ‘범위’로 해석한다면 합은 면적이 되어 60리×40리=2400(평방)이므로 ‘합 2400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합 200여리’는 범위가 아니라 거리임이 명백하다.  황성신문 기사는 대한제국 내부가 울도군에 소속한 석도는 울릉도로부터 ‘합 200여리’에 있는 섬임을 통보한 것으로, 이를 km로 환산하면 ‘합 80km+餘(알파)km’이다.
 
현재의 실측으로는 울릉도로부터 독도까지 거리가 92km이므로, ‘餘(알파)’가 12km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의돼야 할 것은 오식의 문제다.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 200여리’에서, 동서 60리가 160리의 오식인지, 혹은 합이 100의 오식인지, 앞의 두 숫자와 합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이것이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다.

獨島와 石島
독도로부터 동서 60리, 남북 40리는 울도군수 심흥택이 보고한 ‘울릉도로부터 100여 리의 독도’를 연상케 한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일본이 자국의 통치 행정관리 지역인 독도를 몰래 일본영토로 편입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1906년 3월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중앙정부에 올리는 긴급보고에서 ‘本郡所屬 獨島가 在於本部外洋 百餘里옵더니…(울도군 소속 독도가 울릉도의 바다 밖 100여 리니)’라고 하여 울도군에 소속되어 울도군수가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독도가 울릉도로부터 100여 리의 거리에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해의 중앙 수역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 죽서도는 울릉도에 지극히 가까운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다. 울릉도에서 60리든, 100리든, 200리든 존재하는 섬은 석도(독도)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는 독도로부터 392리(157km) 동남쪽에 일본의 오키섬(隱岐島)이 처음 나온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 울릉군수가 소속 관리하는 섬이 울릉도와 죽도와 석도라고 했으니, 황성신문 1906년 7월13일자 기사(대한제국 내부의 공문서)에서 울릉도로부터 석도까지의 거리가 ‘합 200여리’라고 했다면 석도가 곧 독도임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좋은 증명자료가 되는 것이다.  ‘석도=독도’임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제정 공포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제국 1900년 칙령 제41호는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영토에 대한 도발 방지를 동기로 하여 제정 공포된 것이다. 일본이 청일전쟁(1894~95년)에서 승리하자 일본인들은 불법으로 개항장이 아닌 울릉도에 떼를 지어 밀입국해 거류하면서 벌목과 어업에 종사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대한제국 내부대신은 1899년 9월15일 외부대신에게 일본공사관에 요구하여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들을 기한을 정해 돌아가게 하고, 불통상(不通商)항구에 밀수한 것을 조사 처벌해 영구히 두절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외부대신은 내부대신의 요청사항을 일본공사에게 요구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이러한 요구에 일본공사는 9월22일 ‘불통상항구의 외국인 밀무역에 대한 단속은 귀국 지방관의 직권이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방관에게 일본인들의 철수를 알리도록 권고한다’는 매우 오만불손한 회답을 보내왔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10월 내부관원 우용정을 책임자로 한 국제조사단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사정을 정밀히 조사하기로 했다. 이 조사단에는 부산해관세무사인 영국인 라포트(e. laporte, 한국명 라보득)와 재부산일본부영사관보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 및 일본인 경부(경찰, 渡邊鷹治郞)가 참가해 1900년 6월1일부터 5일간 울릉도 일대의 사정을 조사했다.

 
국제적 고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대한제국 정부는 우용정 일행 국제조사단의 현지조사 보고에 기초해 울릉도를 승격시켜서 ‘군’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1900년(광무 4년) 10월22일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를 내각회의에 제출했다. 이 청의는 1900년 10월24일 의정부회의(내각회의)에서 8대 0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다음날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관보에 게재하고 전국에 반포했다.
 
이 칙령에 의해 울릉도는 강원도 울진군수의 행정을 받다가 이제 강원도의 독립된 군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울도군의 초대 군수로는 배계주가 임명됐다.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 주목할 것은 제2조 ‘울도군의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 울릉도 주민의 절대다수는 1883년 울릉도 재개척 정책에 의해 이주한 전라도 경상도의 남해안 출신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우산도가 두 개의 큰 바윗돌로 구성된 암서(岩嶼)임을 주목해 그들의 관습대로 ‘돌섬’이란 뜻의 사투리인 ‘독섬’이라고 불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 주민들의 호칭인 ‘독섬’을 의역하여 ‘石島’라 한 것이다. ‘독섬’을 뜻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즉 ‘우산도=독섬=石島=獨島=리앙쿠르島(프)’인 것이다.  울릉도 어부들의 이러한 명명방식은 독도를 리앙쿠르島라고 이름 붙인 프랑스 탐험선 리앙쿠르(liancourt)호의 명명 방식과 일치한다. 이 탐험선은 우산도=독도를 자기 배의 이름을 따되, liancourt ‘islands’라고 하지 않고 liancourt ‘rocks’(岩嶼)라 하여 ‘바윗돌섬’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을 울릉도 어민들의 방식으로 보면 역시 리앙쿠르岩=‘돌섬·독도·岩嶼’인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메이지 15년) 발행한 ‘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독도를 아예 리앙쿠르‘石’이라고 표기해 수록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관제를 개정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킬 때 국제조사단에 참가한 영국인 부산해관 세무사 라포트의 복명서도 참조했다. 그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에 친숙한 인물이었으며, 우산도를 리앙쿠르‘rocks’(岩, 石)라고 부른 표기에 친숙했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제41조를 발표할 때 각 섬의 명칭을 약간씩 수정했는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고, 죽서도를 죽도라고 했으며, 우산도에 대한 어민들의 명칭인 ‘독섬’ ‘독도’를 의역해 한자로 ‘石島’로 번역 표기했다. 이때 국제조사단의 영향으로 서양인이 우산도를 ‘리앙쿠르石島’라고 호칭한다는 사실도 참고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 제41호로 독도(石島, 獨島)의 울도군수 행정관리를 통한 영유를 중앙정부의 관보에 게재한 것은 ‘국제적 고시’의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중앙정부 관보는 의무적으로 대한제국의 체약국 공사관에 발송되고, 각국 공사관도 이 중앙정부의 관보를 반드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관보 고시는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를 재선언한 것이었다. ‘재선언’이라고 한 것은 이미 15세기에 ‘동국여지승람’에서 우산도(독도)의 조선 영유가 당시 조선의 교역국가에 선언됐기 때문이다.
 
무주지(無主地) 선점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하나의 군으로 독립시켜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독섬’을 한자로 의역해 ‘石島’로 표기했지만, 당시에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음을 취해 ‘獨島’라고도 표기됐으며, ‘石島’와 ‘獨島’가 병용되고 있었다.
보통 ‘獨島’라는 명칭은 일제가 1905년 ‘독도’를 침탈한 사실을 알게 된 울도군수 심흥택이 1906년 3월 중앙정부에 보고서를 낼 때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전부터 울릉도 주민들은 ‘獨島’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일본 해군이 독도 침탈에 욕심을 내기 시작해 군함(新高號)을 울릉도에 파견,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탐문조사를 했을 때인 1904년 9월25일자 보고에 ‘리앙쿠르岩을 한인은 獨島라고 쓰고 本邦(일본) 어부들은 약하여 리앙쿠르島라고 칭한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松島(울릉도-인용자)에서 리앙쿠르岩 實見者로부터 聽取한 情報. 리앙쿠르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리앙꼬島’라고 호칭한다.(‘軍艦新高行動日誌’(日本防衛廳戰史部 소장) 1904년 9월25일)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단체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일제가 독도를 몰래 침탈했다는 정보를 처음 듣고 1906년 3월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를 올리면서 ‘本郡所屬 獨島가 在於本部外洋百餘里許이옵드니…”라는 서두로 시작했다. 여기서 울도군수 심흥택이 독도가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기록한 것과, 위의 일본 군함(新高號)의 보고에서 ‘독도’(리앙쿠르岩)가 이미 1904년 9월 이전에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獨島’로 표기되고 있었다고 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는 리앙쿠르島가 곧 獨島로서 이미 1904년 9월 이전에 울도군에 속한 한국영토임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이 리앙쿠르島를 ‘영토편입’했다고 하는 1905년 이전의 일이다.  1904년 일본인 어업가 나카이(中井養三郞)가 한국영토인 독도에서의 해마잡이 독점권을 한국 정부에 청원하려고 교섭활동을 시작하자, 이 기회에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군사전략상 새로이 가치가 높아진 ‘독도’를 아예 일본영토로 탈취해 여기에 해군망루를 설치하려는 일제의 공작이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일본 정부는 나카이의 청원서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1905년 1월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고 결정했다. 이 일본 내각회의 결정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 전제로서 근거가 된 것은 ‘리앙쿠르島(독도)는 다른 나라가 이 섬을 점유했다고 인정할 흔적이 없다’며 임자 없는 ‘무주지(無主地)’라는 점이었다. 즉 ‘한국영토’를 ‘무주지’로 만들어서 지우려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인이 ‘무주지’를 선점한 것으로 만들어 ‘무주지 선점’에 의한 영토 편입이라는 당시의 국제공법 규정에 맞추려 했다. 따라서 독도가 1905년 1월 이전에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토’였음이 증명되면, 이 ‘무주지 선점론’에 의거한 일본 내각회의의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태정관(太政官) 공문서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이 신라에 통일된 이래 계속 한국영토로 존속해왔으므로, 역사적 진실은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 섬’(有主地)이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1900년 칙령 제41호는 국제공법상으로도 독도(石島)가 울도군수의 행정관리 아래 있는 한국영토임을 증명하므로, 1905년 일본 정부의 독도 영토편입 결정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일본 측에서는 1905년 1월28일 이전에 독도(리앙쿠르島)가 무주지가 아니라 한국영유의 유주지임을 일본 정부 공문서로 증명해준다면 완벽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으므로 2개의 일본 공문서에 의거해 이를 증명하기로 한다.  
 
첫째로 주목해야 할 결정적인 자료는, 메이지(明治) 정부의 외무성과 태정관(太政官)이 독도를 조선의 영유(부속)로 인정한 일본 외무성 자료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직후인 1869년 12월 조선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고위관리인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사이토 사카에(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했다. 이들이 내탐 결과를 보고한 문서가 바로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여기에서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가 조선의 부속령임을 확인했다. 이 자료는 ‘일본외교문서’ 제3권 사항 6, 문서번호 87에 수록돼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자료는 메이지 정부의 내무성과 태정관이 1877년(메이지 10년)에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 없는 곳이라고 명백하게 결정한 공문서다. 일본 내무성(內務卿 大久保利通)은 1876년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제하는 사업에 임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질의서(‘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동해내의 竹島 외 一島 地籍編纂에 대한 質稟’)를 1876년 10월16일자 공문으로 시마네현으로부터 접수했다.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에 걸쳐 시마네현이 제출한 부속문서뿐 아니라, 겐로쿠(元祿) 연간(조선의 숙종 연간에 해당)에 조선과 교섭한 관계문서들을 모두 조사한 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내무성은 이를 내무성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여겨 시마네현이 제출한 문서들과 일본 겐로쿠시대에 조선과 왕래한 외교문서들을 부속으로 별첨해 1877년 3월17일 당시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했다.  
 
신용하
1937년 제주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 (경제학)·박사(사회학)
서울대 교수, 독도학회 초대회장, 백범학술원 초대원장, 한성대 이사장
국민훈장 모란장, 제4회 만해학술상, 제3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제43회 학술원상
現 이화여대 석좌교수
저서 :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사회사’ ‘한국근대지성사 연구’ ‘신용하 교수의 독도이야기’ 등
태정관에서는 내무성의 품의서를 검토한 후 조사국장의 기안으로 1877년 3월20일 “품의한 취지의 竹島 外 一島의 건에 대하여 本邦(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것”(伺之趣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이라는 지령문을 작성해 이를 결정했다.  이 태정관의 지령 안에서 竹島(울릉도) 그 외 一島(松島,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그 앞에 “위는 겐로쿠 5년 조선인이 입도한 이래 該國(조선)과 왕복의 결과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전제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여서 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명백히 밝혀 결정한 것이다.
 
결국 내무성과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일본의 영토가 아니어서 일본은 이에 관계가 없다고 1877년 3월29일자로 재확인해 공적으로 지령했던 것이다.  위에서 든 일본 정부의 1869~70년 내무성과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의 공문서와 1877년의 내무성과 태정관의 공문서는 일본 정부가 1905년 2월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이며, ‘무주지’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주인이 있는 ‘유주지’임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도를 ‘무주지’라고 전제한 1905년 2월22일의 일본 정부 독도 영토편입 결정은 한국영토에 대한 고의적 침탈이며, 완전히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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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 속의 역사2> 고종의 처연한 몸짓, 덕수궁 석조전 즐거운 여행or유적

2005/04/27 09:32



복사 http://blog.naver.com/wogawoga/140012329095



 


[출처] <근대건축 속의 역사2> 고종의 처연한 몸짓, 덕수궁 석조전|작성자 살찐삐삐


 
 


얼마 전 문화재청은 창경궁 대온실(大溫室), 덕수궁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전남 고흥군 소록도 병원을 비롯한 근대문화유산 18건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등록문화재란 지정문화재가 아니라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축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문화재 중에서 보존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창경궁 대온실, 덕수궁 석조전과 정관헌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경복궁에 있던 전통공예관, 창경궁에 있던 황실박물관이 왕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일제시대에 지어져서 헐려나간 것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문(大漢門)으로 들어서면 중화전(中和殿) 약간 뒤쪽으로 우람하게 서 있는 서양식건물이 보인다. 바로 석조전(石造殿)이다. 석조전은 고종이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한 뒤 들어서게 된 몇 개의 양관 중 하나다.

동관은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1900년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john mclevy brown)이 주도해 하딩(g. r harding)이 기본설계를, 로벨(lovell)이 내부설계를 했다. 이때 감독으로는 우리나라 건축가 심의석,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 일본인 소천(小川)이 관여해 1910년 완공되었다.

정면 합각에 황실 문장인 오얏꽃(李花)이 새겨진 3층 건물로 고종이 살기도 해서 지층은 시종들의 공간 2층은 접대 공간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로 이용되었다.




<덕수궁내의 석조전 서관>
 
서관은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의 설계로 1937년 착공한지 2년 만에 완공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1933년 덕수궁이 일반인에게 공개되면서 창경궁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인 황실박물관의 유물을 석조전에 옮기려 했으나 여기에 일제가 일본 화가의 작품을 전시해 버렸다. 이에 황실의 반발이 생겼고 이를 잠재우기위해 급하게 지어 황실박물관의 유물을 옮겨오게 된 것이다.

서관 역시 석조전 동관과 같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 두 건물을 건널 복도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이 두 건물을 합쳐 일제는 황실박물관이라는 이름대신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켜 불렀다.

석조전은 광복 후에도 외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여기서 열렸고 그 뒤 유엔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이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53년 이후에야 우리 손으로 넘어와 국립중앙박물관, 현대미술관을 거쳐 현재 동관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석조전은 마치 외세의 상징처럼 서서 다른 건물들을 짓누르고 있다. 석조전 하나만 떼어 놓고 보면 어떨지 몰라도 궁궐의 다른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아름답지 또한 못하다. 앞에 있는 분수 역시 전통조경에는 없는 것이라 그런지 낯설다.

덕수궁에는 또 하나의 양관이 있는데 바로 함녕전(咸寧殿) 뒷동산에 있는 정관헌(靜觀軒)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벽을 텄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로 1900년경 지어졌다. 난간에는 구리로 사슴, 소나무, 박쥐, 덩굴무늬 등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 섬세함을 더한 모습이다.
 
 



<덕수궁내의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함녕전창호>

<덕수궁 함녕전 행각의 외관>
 
이곳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 위베르의 처형, 손탁(antoinette sontag)이 들여온 가배(커피)와 다과를 즐기던 장소로 전한다. 그것으로 보아 내전 후원의 정자 기능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에 오면 편안함 보다는 외세의 압력에 전전긍긍 했을 고종의 처연한 모습이 그려져 안타깝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또 하나 떠 올리기 싫은 기억, 1905년 을사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한 비운의 장소 중명전(重明殿)이 나온다. 중명전은 1900년경 궁 안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고종의 접견장소 및 연회장으로 쓰였으며 순종과 윤비(尹妃)가 가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궁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후에 외국인들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의 사교장소로 쓰이다가 현재는 개인소유가 되어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궁궐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은 참담하다. 본연의 이름, 경운궁(慶運宮)조차 빼앗기고 서 있는 덕수궁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 첫째는 여기저기 외세에 의해 파괴된 흔적이 얼룩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제의 압력에 밀려 다른 외세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고종의 처연한 몸짓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지금, 여기 이렇게 서서 파괴되고 상처받은 이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고 이것이 진실이라고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궁궐의 모습을 일제시대 이전인 조선시대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다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석조전이 비록 궁궐의 모습을 훼손하였다 해도, 아픈 상처를 떠올린다 해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환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니리포터 이재성 기자 /leezorba@yahoo.co.kr | 홈페이지 http://leeand.com


편집시각 2004.04.28(수) 16:35 kst


<기사출처> 한겨레 신문(http://www.hani.co.kr/)
<사진출처> 문화재청(http://www.o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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