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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최악의 발굴'악명'...만신창이가 된 창녕 고분들⑭ 1918~19년 창녕고분 발굴의 참극
남도고분 서너개 파보고 "왜의 땅" 못박은 야쓰이...남도를 왜의 땅으로 단정, 임나일본부 왜곡 씨앗 뿌렸다
 
한겨레 기사입력 :  2016/08/2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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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최악의 발굴 '악명'..만신창이가 된 창녕 고분들 100년전 팠던 익산 쌍릉은 판도라의 상자가 됐다
 
 
한겨레| 입력 16.08.23. 16:26 (수정 16.08.23. 16:36)

[한겨레]‘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⑭ 1918~19년 창녕고분 발굴의 참극

화차 2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유물들 쏟아졌지만
야쓰이는 보고서 한장 내지않고 유물들 빼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뒤 방치된 고분들은 도굴꾼과 일본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야쓰이가 찍은 1918~19년 창녕 교동고분의 굴착조사 현장. 봉분 한쪽을 허물고 내부 석실 구멍을 노출시킨 모습이다. 조선인 인부들과 그들이 가져온 흙지게 등도 보인다.

 

한국 고고학사상 최악의 발굴을 꼽는다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하룻밤새 무덤 안 유물을 깨끗히 청소해버린 1971년 무령왕릉 조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엔 이를 능가하는 보물 싹쓸이 작전 같은 발굴 참사가 두고두고 일본 학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불과 두달여만에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경남 창녕 교동고분군의 대형 무덤 9곳의 유물들을 싹쓸이하듯 걷어간 뒤 보고서조차 내지않은 야쓰이 세이이츠의 단기조사 작업이 그것이었다.

 

가야권 유적들은 1910년 건축사학자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의 조사단이 조선 고적을 예비답사할 당시부터 상당한 눈길을 받았다. 당시 진주 옥봉·수정봉 유적과 고령 지산동 산허리의 가야고분군, 도굴로 일부 석곽이 드러난 창녕 고분군을 답사한 세키노는 “가야 유적이야말로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조사성과”라고 평하기도 했다. 일본과 가장 인접한 경남 일대 가야권에서 임나일본부설과 3세기 진구왕후의 한반도 정벌을 실증할 증거들이 나올 공산이 가장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주와 가야권을 잇는 낙동강변의 요지 창녕에는 산자락에 경주에 버금갈만큼 많은 고분군들이 흩어져 이마니시 류 등의 여러 일인 학자들이 일찍부터 눈독들이며 답사를 진행했다.

 

이런 와중에 교동 발굴에 나선 야쓰이는 마음이 초조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발견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유적 출현을 고대했으나, 1917년 그가 조사하면서 ‘왜’ 자체로 단정한 전라도 나주 반남고분 외에는 백제·신라권에서 도드라진 실물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이런 실정에서 1918년 창녕 교동고분을 처음 발굴조사한 후배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하마다 고사쿠가 토기와 장신구 등 주목할 만한 출토성과를 보고하자, 야쓰이는 갑자기 마음이 동해 그해 12월 겨울인데도 창녕 교동 일대의 거대 고분으로 달려갔다.

 

춥고 땅이 딱딱한 악조건 속에서 야쓰이는 가장 큰 규모인 7호분과 89호분의 굴착조사에 매달렸다. 교동 7호분은 봉토의 지름이 31.2m, 높이 8.5m에, 내부 석곽의 주검방 길이 9.0m, 너비 1.7m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었다. 발굴 인부들은 봉토 남단벽의 상부가 완전히 노출된 상황에서 벽석의 일부를 제거하고 깊은 곳 석곽 안을 대놓고 드나들었다. 무덤 봉분 한쪽을 허물어뜨려 내부의 석곽과 널길이 완전히 드러나게 한 뒤 그 안의 유물을 노골적으로 쓸어담는 작업장 얼개였다. 문자 그대로 보물털기식 발굴이었던 셈이지만, 창녕이 <일본서기>에 진구왕후에게 항복해 조아린 7개국중 하나로 기록된 ‘비자벌’임에 분명하다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던 야쓰이에겐 정벌과 복속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    야쓰이의 조사 당시 돌로 쌓은 창녕 교동고분 석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내부에 토기류가 가득 들어차있다.

현장에서는 전례없이 막대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석곽안 무덤방은 그릇받침인 기대나 목긴 항아리 장경호,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들로 가득했다. 영남권에서는 처음으로 금동관의 파편과 금제귀고리, 은제대금구, 장식대도 등 고급 금공예품들이 나왔다. 우메하라 스에지 등의 일본 학자들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량의 유물이 고분을 빠져나갔다고 회고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나 야쓰이는 이 거대 고분에 대해 보고서 한장 내지 않고, 유물들만 반출해버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문서기록을 보면, 야쓰이가 7호분에서 캐어간 유물들만 최소 700점이 넘는다. 하지만, 9기의 대형고분에서 발굴한 전체 유물들의 수량과 내역은 지금도 전모를 모른다. 마구나 금공품 등의 몇몇 일급 유물은 총독부 박물관에 보냈지만 상당수는 딴 곳으로 빼돌렸을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왜 보고서를 내지 않았는지 야쓰이는 비망록에 기록을 남기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추정해볼 수 있다. 창녕고분에서는 고대 일본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유물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출(出)자형의 금동관 파편이나 환두대도 등에서 보이듯 7호분과 89호분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부분 친신라계통 유물들이 대부분이고, 일본과 연관되는 건 직호문이란 무늬가 새겨진 칼집 장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왜곡된 학문적 목표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야쓰이가 보고서 작성에 의욕을 잃고 유물 반출에만 눈을 밝혔던 셈이다.

 

창녕 고분의 후일담은 비참하다. 19년 조사가 끝난 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일차 표적이 되어 벌집을 쑤신 듯했지만, 총독부는 도굴구멍만 막는 땜질대책만 내놓았다. 대구에서 장사하던 상인 오쿠라 다케노스케는 그 사이에 창녕 고분 출토·도굴품들을 마구 빼돌려 악명높은 오쿠라컬렉션을 구축했다. 막강한 지역세력이던 창녕의 가야 선조들 무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고, 해방 뒤에도 무덤과 유물의 성격, 실체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파묻혀졌다. 2012년 우리문화재연구원이 교동 7호분을 90여년만에 재조사해 유구 보고서를 냈고, 국립김해박물관이 2015년 출토유물 보고서를 뒤이어 낸 것이 선조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됐을까.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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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고분 서너개 파보고 "왜의 땅" 못박은 야쓰이 한겨레| 입력 16.07.26. 19:06 (수정 16.07.26. 21:56)

[한겨레]1917~1918년 나주 반남고분 발굴 전말
남도를 왜의 땅으로 단정, 임나일본부 왜곡 씨앗 뿌렸다

1917년 야쓰이 조사단이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한 5세기께 금동관. 백제권 유적에서 유일하게 완형을 갖춘 채 나온 금동관이다. 제작지가 백제인지 마한인지를 놓고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는 유물이다.
1917년 야쓰이 조사단이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발굴한 5세기께 금동관. 백제권 유적에서 유일하게 완형을 갖춘 채 나온 금동관이다. 제작지가 백제인지 마한인지를 놓고 학계의 견해가 엇갈리는 유물이다.
 
 
▲1917~18년 나주 반남고분 발굴 당시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대형 옹관과 토기들.

“고약한 날씨군. 제대로 유적을 조사할 수 있을까.”

 

1917년 12월18일 눈발이 세차게 휘날리는 전남 영산강 기슭의 나주 들녘을 일본인 세 명이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날 나주에 도착해 반남면 사무소에서 새우잠을 잔 이들은 역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와 측량기사 오가와 게이키치, 화가 오바 쓰네키치였다. 조선총독부의 2차연도 고적조사사업의 하나로 영산강 일대 고분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터였다. 원래 우두머리였던 세키노 다다시 도쿄제국대학 교수가 빠져 조사는 야쓰이가 총괄 책임을 맡았다. 일행은 눈보라 속 벌판을 둘러보았다. 반남면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의 너른 들판에 크고 작은 고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네모진 모양새가 도드라진 고분 하나를 주시한 야쓰이가 말했다. “저것부터 조사한다. 일단 실측한 뒤 발굴을 시작한다.”

 

오늘날 영산강변에 남은 마한시대 대표고분이자 백제권에서 유일한 완형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고분은 약 100년 전 이렇게 일본인들의 시선에 끌려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조사에 참여했던 오가와 게이키치의 수기를 보면, 조사단은 12월19일 외형을 실측해 고분 평면이 사각진 방형이라는 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20일부터 신촌리 9호분으로 명명한 고분의 굴착조사에 들어갔다.

 

26일까지 진행한 굴착 결과는 일행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봉분 중앙부 무덤 방에서 지역 지배세력이 관으로 쓴 10여개의 옹관과 부장품 토기들이 발견됐는데, 23일 ‘을옹관’이라고 이름 붙인 대형 옹관을 갈라보니 반짝이는 금동관과 큰칼, 창, 화살촉, 옥기류, 금동신발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첫 사례로,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금관보다 4년이나 앞선 발견이었다. 외관과 내관으로 이뤄진 금동관은 매우 정교했다. 관대 테두리에 풀꽃 모양의 세움장식 3개를 꽂았고 내관은 반원형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어졌다. 신라 금관과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세움장식이 신라 특유의 출(出)자 모양이 아닌 초화형이어서 영산강 유역 고대인들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하는 걸작이었다. 다른 옹관에서는 부식된 인골과 큰칼, 화살촉 등도 확인됐다.

 

야쓰이는 당시까지 평양 일대 낙랑계 유적 조사에 몰두했지만, 진구왕후의 삼한 정벌과 임나일본부 등으로 대표되는 고대 일본의 조선남부 경영에 대한 흔적 찾기에도 부심하고 있었다. 남도의 반남고분에서 일본과 연관지을 만한 보물들이 나타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야쓰이는 장기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폭설과 빈약한 조사예산 탓에 돈을 빌려가면서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야쓰이 비망록 컬렉션에는 당시 그가 발굴도구와 비용을 관청 등에서 빌려 쓴 차용증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결국 비용 문제로 조사단은 9호분에 짚 가림막을 쳐놓고 27일 경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0월에야 다시 현장을 찾은 야쓰이 조사단은 임나일본부설의 왜곡된 기틀을 놓게 될 유물들을 찾아냈다. 신촌리 고분의 정상부와 가장자리에서 ‘하니와’라고 불리는 일본식 ‘원통형 토기’들이 줄줄이 열을 지어 출토된 것이다. 4~7세기 일본 고분시대 대형 무덤 봉분 외부를 장식한 전형적인 토기들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 단연 주목됐다. 야쓰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강역 삼은 직접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17~18년 반남고분 발굴 당시의 유리건판 사진들이 남아 있는데, 신촌리 9호분 출토품 사진들이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해 그가 당시 얼마나 유물 발굴에 열광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야쓰이는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요약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고분들은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란 제목의 특별보고로 제출하려 한다.”

 

 

야쓰이가 공언한 특별보고서는 1921년 그가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끝내 간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2년에 걸친 반남고분 발굴의 결과물들은 20세기 초 일본 학계에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고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선구가 된다. 야쓰이는 3~4세기 일본 야마토 국가가 한반도 남부를 일종의 식민지처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진구왕후의 신라정벌설을 신봉하면서 당나라와 결탁한 신라의 배신으로 일본 품에서 떨어져나갔던 고토를 근대에 다시 찾게 됐다고 생각했다. 나주 반남고분 발굴을 통해 한반도 남부가 과거 왜의 땅이란 증거를 드디어 찾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교과서나 역사책에 실린 고대 한반도 지도를 보면 경상도 남부부터 전라도 서해안까지를 임나일본부 혹은 ‘가라’(야마토 국가와 가까웠던 한반도 남부 정권으로 국내 학계에선 가야연맹체 국가를 지칭한다)의 강역으로 표시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런 왜곡된 표기는 야쓰이 조사단의 나주고분 조사에서 그 맹아가 유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인성 영남대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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