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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6.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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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적으로 일본 대사관은 대(對)한국 정보수집의 최전선이다
이 대화를 엿들은 한국인 직원은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기사입력 :  2014/08/1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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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선의로 접근한 노무현, 독도로 뒤통수 친 일본
[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11> 독도와 일본 우익



 
-중략-
 
정식 취재도 원천 봉쇄한 일본 대사관

내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이 ‘Japan as No.1’이라 불리며 세계 경제를 휘어잡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일본의 ‘대(對) 한국 정보활동’이 궁금했다. 과거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인들이 지금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주한 일본대사관에 정식 취재 요청을 했다. 그러나 대사관은 전혀 뜻밖의 태도를 보였다. 우선 사무실 출입부터 막았다. 허용된 장소는 1층 로비 옆 작은 밀실. 자료 요청은 100% 거부됐다. 문화원 홍보책자마저 “재고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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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대가리들의 오두방정 삽질로는 결코 일본을 제압할수 없다!
독도 문제와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문제및 북핵문제를 하나의 문제로 인식할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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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대사관 전 직원에게 나와 접촉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평소 자유로운 취재를 허용하던 이웃 미국대사관과는 180도 달랐다.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궁리 끝에 일본 대사관을 담당하는 우리 정보요원들을 찾아갔으나 이미 그들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함 기자에게 정보를 주면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답니다.”

대사관은 마치 나를 스파이 대하듯 했다. 이후 어렵사리 취재를 했지만 이 경험은 대단히 유익했다. 일본인들의 실체, 그들이 곧 ‘정보인간(情報人間)’임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보안의식과 미시적(微視的) 두뇌 플레이는 참 대단했다.

시스템적으로 일본 대사관은 대(對)한국 정보수집의 최전선이다. 대사관 내 정치·경제·문화·영사 파트가 각자 독자적으로 정보경쟁을 벌인다. 여기에 상사 주재원·특파원·교수·유학생 등 민간인이 가세한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가 본국으로 넘어가면 외무성, 내각조사실, 자위대, 경찰청, 종합상사 정보망 등과 오케스트라를 이뤄 한국의 실상이 샅샅이 파헤쳐진다.

일본인들은 철저한 정보인간들이었다. 당시 취재에 협조한 한국인 직원의 증언이 지금도 생생하다.

1980년대 초 마에다(前田) 주한 일본대사가 김포공항에서 일본 유력 정치인을 태우고 양화대교를 건널 때였다. 대사는 갑자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 대한 일화를 꺼냈다. 이노우에는 내무·외무대신을 지낸 거물임에도 1894년 직급을 3단계나 낮춰 조선 공사(국장급)로 부임했고 1년 뒤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그분이 양화진 나루터(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내려 서울로 들어가면서 한 일이, 줄곧 가마꾼 걸음 수를 센 겁니다. 부임 첫날 그는 가마꾼 보폭에다 걸음 수를 곱해 양화진에서 경복궁까지 거리를 산출해 냈는데 지금 실제거리와 거의 맞아요. 선배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일을 했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도대체….”

이 대화를 엿들은 한국인 직원은 “섬뜩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조슈번은 일본 우익의 본거지

구한말 양화진은 제물포(인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수로(水路)의 관문이었다. 1895년 일본 군인들과 칼잡이 80여 명은 경복궁에 침입,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고 불태워 버린 뒤 달아났다. 그들 대부분이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가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이노우에가 기획하고, 후임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전 육군 중장)에 의해 실행됐다. 이들이 바로 일본 우익의 본거지인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출신이다.

공교롭게도 구한말 조선침탈 원흉 대부분이 조슈 인맥이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 원수·총리 역임) ▶1905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육군대신·총리) ▶1909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한일합방을 총지휘하다 안중근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총리) ▶1909년 2대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사법·재무대신) ▶1910년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육군대신·총리) ▶1915년 2대 총독으로 부임해 무단통치를 강행한 하세가와 요시미치(육참총장·원수)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이들을 제자로 삼아 조선·만주 정복을 주장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同亞共榮論)을 가르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 역시 조슈 사람이다.

일본 우익의 본고장이자 한국 침탈 주역들의 고향인 죠슈번(현 야마구치현).


이제는 대놓고 “독도는 일본땅” 망발

이런 사실 등을 놓고 볼 때, 2003년 6월 노 대통령의 방일 이후 일본 우익들이 향후 독도를 이슈화시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네들로서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주간지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는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대통령의 방일로 일본 우익들이 오판할 것 같습니다. 가상소설 독도를 써주십시오.”

주제와 대강의 줄거리를 말해 주었다. 1주일 뒤 원고를 받았다.

‘미·일은 가깝고 한·미는 멀어진 21세기초 동북아 상황. 군사 대국화로 가는 일본은 한·미 관계가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보고 독도를 침공, 무력 점령한다. 미국은 모른 체 하고 국제사회도 잠자코 있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지만 일본 대사는 적반하장으로 그동안 독도를 ‘강점’한 것과 일본군 피해 등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다. 또한 2003년 제정된 유사법에 따라 한국내 자국민 보호 명목하에 자위대를 서울에 배치시키고 사실상 한반도 강점에 나선다….’(주간조선 2003. 6.26)

우려는 그로부터 불과 2년도 안돼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005년 2월 23일, 주한일본 대사가 느닷없이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이름)는 일본 땅”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펄쩍 뛰고 온 국민이 들끓었다. 노 대통령도 흥분을 참지 못해 “외교전쟁 불사” 등 화끈하게 대응했다. 방한한 미 국무장관(콘돌리자 라이스)을 붙잡고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정부·의회·언론 등이 모두 나서 독도 문제를 정면 거론하기 시작했다. 일본 항공기들이 공공연히 독도 상공을 비행하는가 하면, 전 세계 일본 외교관들이 가세했다.

이는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 일본은 독도에 관한 한 간혹 총리나 극우 정치인의 망언이 나오긴 하지만 정면 대응은 하지 않았다. 과거 한반도 침탈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고, 한국 뒤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영토 분쟁은 사실 전쟁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이슈다. 때문에 역대 한국 정부도 굳이 떠들어 국제분쟁화 시킬 필요는 없다는 전략에 따라 ‘조용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정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14년 현재. 일본인들은 이제 누구나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학교에서는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일본은 더 이상 ‘고개 숙인 패전국’이 아니다. 군사 대국화로 성큼성큼 나가고 있다. 이 거친 행보를 총지휘하는 이가 바로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다. 그의 가계(家系)는 화려하다. 아버지가 외무대신, 외조부 2명이 총리, 고조부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 땅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들도 일본 우익의 산실인 조슈(현 야마구치·山口) 출신이다.

아베 총리는 작년 8월 기자들을 대동하고 19세기 침략적 대외정책을 주장한 그들의 ‘영웅’ 요시다 쇼인의 묘소를 공개적으로 참배했다. 아베는 과연 어떤 다짐을 했을까.

그들에게는 ‘서울에 남겨둔 꿈(漢城之殘夢)’이 있다. 게이오(慶應)대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 말처럼 “조선은 빼앗길 수 없고, 빼앗겨서도 안 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 관계의 땅”이다. 그 꿈은 조슈 인맥을 통해 지금 아베 총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앞으로 한·일간 일촉즉발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 과연 그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jmedia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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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명성황후 시해 개입 물증 111년 만에 ‘햇빛’


입력 2006-06-05 03:00:00 수정 2009-09-29 22:26:05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전권을 위임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당초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했던 그는 일본 각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성황후 시해를 수행할 자신의 후임자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른쪽)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가 일본 군대의 호위를 받은 낭인들의 급습으로 참변을 당한 경복궁 내 옥호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정말로 무서운 것을 찾아냈다. 일본인으로서는 짐작은 했지만 찾아내기는 힘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개입했음을 방증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보고 고야쓰 노부쿠니(子安宣邦·정치사상사) 일본 오사카(大阪)대 명예교수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지난달 중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세계석학초청강좌에 초대된 고야쓰 교수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이 편지의 해독에 큰 도움을 줬다. 한자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한문서체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들을 동원해 그 뜻을 명확히 규명해 줬다.
 
 


▽‘1895년 7월 8일’의 의미=이 편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가 쓰인 시점. 1895년 7월 8일은 일본 정부의 정책이 회유책에서 강경책으로 전환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확보했다고 자신했던 일본은 1895년 4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遼東) 반도를 되돌려 줬다. 이를 지켜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책으로 돌아서 5월 13일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대신 조희연을 파면한 뒤 28일에는 친일 성향의 2차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친러파를 대거 기용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한 일본공사는 본국 정부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6월 20일 귀국했다. 이처럼 일본에 불리한 상황은 7월 8일 직전에 반전한다. 7월 5일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주독일 일본공사가 ‘독일의 이탈로 3국 연합은 매장만 안 된 시체’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이노우에의 압력으로 갑오개혁(1894년) 때 내무대신에 임명된 박영효가 7월 6일 역모사건으로 실각했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편지글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편지 속 인물들=이 편지에는 메이지시대의 3대 거물 정치인이 등장한다. 편지를 쓴 야마가타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일본 육군의 창설자이자 1889∼91년 총리를 지낸 거물로 일왕의 자문에 응해 막후에서 국사를 좌지우지한 겐로(元老)였다. 당시 일본 정치는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그리고 편지 속 세외(世外) 백작으로 등장하는 이노우에가 겐로 역을 맡고 있었다. 특히 이노우에는 직함은 국장급인 공사였지만 이토와 영국 유학을 같이 다녀온 친구 사이로 1차 이토 내각의 외상, 2차 이토 내각에서 내상을 맡은 인물이었다.
 

형식상 이노우에의 상관이자 편지를 받은 무쓰 외상은 이노우에가 외상을 맡았을 때 전격 발탁한 인물이다. 무쓰는 그해 6월 5일부터 폐병으로 도쿄 인근 오이소(大磯)에서 요양 중이었다.
 

▽편지의 재구성=일본의 역사소설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는 ‘민비 암살-조선왕조 말기의 국모’라는 책의 결론에서 무쓰 외상이 동향 후배로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가 보낸 편지를 읽고 비로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았다며 “아무리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도 일본 정부와 이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의 편지의 내용을 볼 때 무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에 모종의 강경책을 제시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야마가타가 편지에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한다”고 쓴 것은 무쓰의 강경책에 동의한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해석이다.

 
이 문장에 우리말 존대어미 ‘시’에 해당하는 어(御)가 쓰였는데 최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문제에 전권을 지니고 있던 이노우에가 일을 단행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노우에는 무쓰보다 여덟 살, 야마가타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이노우에는 귀국 직후 조선 조정에 300만 엔의 기증금을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를 회유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내각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제안이었고 편지는 이노우에가 각의 결정을 받아들여 강경책으로 선회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일본 각의가 사실상 명성황후 제거 결정을 내린 때를 바로 이 시점으로 보고 있다. 기증금안을 제시했던 이노우에가 문제의 편지가 쓰인 7월 8일 직후에 돌연 자신의 후임으로 동향의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최고 전문가로 ‘백의종군’에까지 나섰던 이노우에가 긴박한 시기에 외교의 문외한인 미우라를 후임으로 추천한 것은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는 자신보다 ‘칼잡이’가 적격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최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보완해 곧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지식산업사)의 완결판을 출간할 예정이다. 2004년 일역판(사이류샤·彩流社)이 나왔던 이 책은 현재 영역 작업도 진행 중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기자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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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가오루 / 미우라 고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2006/09/1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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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1836.1.16~1915.9.1]

나가토노쿠니[長門國]에서 출생하였다. 1863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함께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바쿠후[幕府] 타도운동에 힘썼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에서 여러 요직을 거쳐 1871년 대장대보(大藏大輔)가 되었으나, 1873년 정부의 재정정책에 불만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 실업계로 들어갔다. 1875년 관계(官界)로 복귀, 1876년 특명전권 부변리대신(副辨理大臣)이 되어 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함께 내한, 조선정부에 운요호[雲揚號]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여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4년 전권대사로 다시 내한, 갑신정변 처리를 위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1885년 제1차 이토[伊藤] 내각의 외무대신, 구로다[黑田] 내각의 농상무대신, 1892년 제2차 이토내각의 내무대신, 청일전쟁(淸日戰爭) 때인 1894~1895년 주한공사,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의 대장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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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사건당시의 공사 : 자작 미우라 고로         이노우에 가오루
(출처 : 세계일보 200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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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고로 [三浦梧樓, 1846~1926]

 
조슈한[長州藩]에서 출생하였다. 막부(幕府)타도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군인이 되었다. 1878년 육군중장, 1888년 예편 후 1890년에 귀족원 의원, 1895년 주한공사로서 조선에 부임한 그는 10월 8일 새벽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일본군과 경찰 및 낭인(浪人)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그 시신(屍身)을 불태우는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해된 황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폐서인조칙(廢庶人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궁궐에 있던 미국인 다이(M.W.Dye:爹  伊)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H.N.Sabatin)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때문에 소환되어, 일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0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이 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정계의 배후조종자로서 활약, 1924년 이른바 호헌삼파(護憲三派:憲政·政友·革新俱樂部) 성립에 진력하였다.

 
 
<출처는 Naver 백과사전입니다>

 

 
 
 
가오루와 사무라이들은 어떤 벌 받았는가?
min****
질문 5건 질문마감률33.3%
2010.01.17 21:09
추천 수 1
답변
1
조회
433

이노우에 가오루와 사무라이들은 어떤 벌 받았는가?
 
극악함이 끝이 없는 그들이 어떻게 처벌되었고, 그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매우 매우 궁금합니다.

 
1번째 답변
답변

이런 식이었답니다.

붉은혜성(spartacus2)
답변채택률70.6%
2010.01.1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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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선생의 글 <매천야록> 중에서...
 
제목: 왜국 정부가 시해 사건의 주동자들을 다 놓아주다.
 
10월에 일본 정부가 공사 삼포오루(미우라 고로: 민비 시해사건의 주동자)를 소환했다. 왜놈들의 재판 결정서에 의해서 오루 등을 범죄자로 몰았지만, 별로 뚜렷한 증거가 없다면서 모두 풀어주었다. 또한 각 보고서에 '대원군이 대궐에 들어가 변란을 주동했다'고 크게 떠들었으며, '오루는 왕명을 받고 구출하러 들어갔을 뿐, 왕후 시해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모두 자기를 엄호하려고 늘어놓은 말들이다.
 

- 출처: <매천야록>, 233쪽, 한양출판사 - 

기실 몇몇 일본인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사죄"를 표명한 바 있지만, 그건 그냥 일개인의 행위였을 뿐 국가적인 차원의 것도 아니었으며, 아울러 미우라 고로의 자손 등이 사죄를 표명했다는 이야기는 못들어봤습니다. 

출처
매천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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