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선거경제/복지미디어전쟁국제정치.경제민족/통일사회/사법군사/안보문화/스포츠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전체기사보기 교육/과학   고대사/근현대사   고향소식/해외동포   포토/해외토픽   자유게시판  
편집  2019.10.23 [06:02]
국제정치.경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조광래 단장이 털어놓은 나로호 개발 秘史
로켓 개발 25년...反美됐지, 하~하 ◇사사건건 태클 건 미국… 우린 반미주의자
 
조선일보 기사입력 :  2013/03/31 [16:58]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Why][이길성 기자의 人사이드] 조광래 단장이 털어놓은 나로호 개발 秘史

  • 이길성 기자
  •  

    입력 : 2013.03.30 03:03 | 수정 : 2013.03.30 23:38

    로켓 개발 25년…反美됐지, 하~하
    "러시아 기술자에 밥사주며 보안 요원들 눈 피해 기술 귀동냥"

    너무 아쉬운 1차발사 실패
    시험서 문제없던 위성덮개 放電예방 조치 안했는데… 하필 그게 말썽날 줄이야


     

    대전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만난 조광래(54)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은 "아직도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5년 1월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갑자기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러시아 우주로켓 개발사인 흐루니체프와 나로호 개발 계약을 맺고 제작에 착수한 지 석 달 만이었다. 그 후 매일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유일한 치료제는 '나로호의 성공'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1월 30일 나호로 발사가 성공한 뒤에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더 심해진 적도 있다.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에 깨진 호르몬 분비의 균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박근혜 정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빗장' 열까
    한국 위도에선 상업 통신위성 쏘는 게 불가능… 해상 발사船이 활로
    로켓 자력개발, 이제 시작이다 "10년前 '이벤트' 아닌 독자 로켓 개발에 나섰다면…"
    [대한민국, 국가현안 족쇄 풀자] 美와 원자력 협상 '출구없는 딜레마'
    [대한민국, 안보현안 족쇄 풀자] 국회도 "미사일 지침 이대론 안돼"
     
    막강한 외교적 파워는 결코 강대국만이 가능한것이 아니다!
    ‘지도자 크기가 나라 크기다’
    "美, 북핵해결 전제 한국 `재처리' 허용 가능"

    지인들은 백발에 숱이 듬성듬성해진 그에게 "지난 10년간 또래보다 10년은 더 들어보일 만큼 노안(老顔)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일곱 살 위 이주진 항우연 전 원장과 동행하면 사람들이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며 웃었다. 그가 늙어버린 10년은 나로호 개발의 시작과 끝이었다.

    나로호의 성공에 찬사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기술을 이전받지 못한 나로호의 성공은 러시아의 성공일 뿐'이란 비판도 있었고, '우주로켓 독자 개발 노선을 나로호 도입으로 바꾼 2002년 결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조 단장은 한국의 모든 민간로켓 개발 현장에 있었다. 1단형 고체연료 과학로켓인 KSR-1과 2단형 고체연료 과학로켓인 KSR-2 개발 때는 전자파트 책임자였다. 최초의 액체연료 로켓인 KSR-3 때는 시스템 책임자에서 시작해 개발 총책임자까지 맡았다. 벼랑 끝에서 성공한 나로호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2021년 발사 예정인 첫 국산 우주로켓의 엔진도 그가 주도해 설계했다.

    그는 지금 로켓 개발자로 살아온 25년을 정리하고 있다. 사료(史料)는 그가 기록해온 연구 일지들이다. 일지는 1988년 6월 대전으로 내려와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충남대 뒷길을 걸어 항공우주연구원(당시 천문과학연구소)으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인생 25년을 바친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조 단장을 만나 나로호 개발 전후의 숨은 이야기를 들었다.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를 이륙하는 나호로를 연속촬영한 사진 앞에 선 조광래 나로호발사추진단장. 그는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감히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배경이 된 장면은 지난 1월 30일 3차 발사 장면을 다중 촬영한 조선일보 이덕훈 기자의 사진이다. / 대전=신현종 기자
    KSLV-2 계획서, 그 속에 나로호가 있다

    ―발사에 성공한 날은 어떻게 보냈나?

    "언론 브리핑, 인터뷰, 보고에 회의까지 마치고 보니 밤 10시 30분이었다. 우주센터 기숙사로 돌아와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수백통의 축하문자에 하나하나 답하고 나니 새벽 2시였다. 불 끄고 누웠지만 잠이 오겠나. 창밖으로 빈 발사대가 보였다. 전날 밤까지 나로호가 있던 곳이다. 두 번의 실패 때도 침대에 누워 빈 발사대를 보았다. 그때는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날 밤엔 지난 10년 세월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모스크바의 추위 속에서 담배를 피우던 모습이었다. 협상 중간중간에 건물 바깥으로 나와 한 대씩 했다."

    그는 2005년 6월 담배를 끊었다. 28년 동안 하루에 2갑씩 피우던 골초였다. 그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끊었다"고 했다.

    ―'나로호에서 한국이 얻은 것은 없다'는 비판이 있다.

    "러시아의 성공이라고 볼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게 없다는 비판은 수용하기 힘들다. 나로호 다음 단계가 한국형 발사체(KSLV-2) 개발이다. 핵심 부품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만든다. 2021년이 발사 목표다. 이미 4000쪽이 넘는 개발 계획서를 완성했다. 엔진까지 포함해 그걸 우리 손으로 썼다. 그걸 어떻게 쓸 수 있었겠나?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1단 로켓이 들어올 때 나로우주센터에는 러시아 보안 요원들이 함께 들어왔다. 처음에는 3인 1조로 한 명이 하루 8시간씩, 나중에는 2인 1조가 교대로 러시아 기술진의 동선을 감시했다.

    ―얻은 것이 있다는 뜻인가?

    "기술자의 생리 같은 것이 있다. 기본적으로 별로 감추려고 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 물으면 답해준다. 어느 나라 기술자나 그렇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하면 '응 그건 이렇게 되는 거야'라고 설명을 한다. 그렇게 대화하고 있으면 어느새 러시아 보안 요원이 와서 옆에 선다. 그들은 '대화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한다. 그냥 온다. 그럼 말 못하는 거지."

    ―그런 짧은 대화가 도움이 됐나?

    "'저녁 먹자'고 한다. 보안 요원이 밥 먹는 자리까지 쫓아오지 않으니까. 밥 먹으면서 물어보면 러시아 기술자들이 이야기해 준다. 족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고 운동한 뒤 회식하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듣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지 아나? 역설적으로 모스크바다. 대전이나 나로우주센터는 러시아 보안 요원이 연구원이 숙소에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 하는 것까지 체크한다. 모스크바는 자기네 동네니까 그런 체크를 안 한다. 퇴근한 뒤 술 한잔하면서 낮에 궁금했던 것 물으면 알려준다. 양국 기술자들이 한 방에서 회의를 하다가 차 한잔 마시고 산책도 하지 않나. 그때 생기는 빈틈도 활용했다."

    ―일일이 메모했나?

    "그냥 저장 매체들을 많이 활용했다는 정도로 이해해달라(웃음)."

    ―개인적 만남에서 얻은 정보를 다 모았나?

    "대화 내용을 내부 보고서로 만들고 누구와 어떤 접촉이 있었다는 식으로 필요한 부분은 다 모았다. 누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뤄졌다. 연구원들은 그냥 친구들과 술 한잔한다는 생각으로 각자 주머니를 털었다."

    독자 개발 로켓? 성공할 수 없었다

    ―독자 개발에서 나로호 도입(2002년)으로 정책을 바꾼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로켓은 엔진이 좋으면 담벼락도 끌고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로켓은 역시 엔진이 핵심이다. 독자 개발하던 액체연료 로켓(KSR-3)은 분사력이 나로호 1단의 13분의 1 수준이었다. 엔진 힘이 너무 약했다. KSR-3로 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해선 엔진을 다발로 묶어야 했다. 그런데 다발로 묶자 KSR-3 몸통의 무게가 위성·연료·산화제를 포함한 전체 로켓 무게의 거의 45%나 됐다. 로켓이 위성을 궤도에 올릴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내려면 그 비율이 15%가 넘지 않아야 한다. 이를 넘으면 위성을 올리는 데 써야 할 에너지가 제 몸통을 들어올리는 데 허비된다. KSR-3는 원천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연소시험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2~3초 타다가 꺼지고 2~3초 타다가 꺼지고.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애초에 안될 KSR-3에 매달린 이유는?
     
     
    "미국에서 출판된 'LEO on the Cheap'이란 책의 영향이 컸다. '지구 저궤도(低軌道)에 위성 싸게 올리기' 정도로 번역되는 책이다. 우주 발사체가 너무 비싸진 현실을 파고든 책이다. 핵심 내용이 '성능이 떨어지는 발사체라도 여러 개를 묶으면 위성을 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은 이 책을 거의 달달 외울 정도였다. 여기에 무슨 길이 없을까 하고. 저자를 만나러 미국까지 갔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 맥도널 더글러스 등에서 은퇴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이 차렸다는 회사를 가보니 사무실만 덩그런 게 거의 페이퍼 컴퍼니 같은 느낌이었다. 다들 말은 청산유수였다. 공장은 어딨느냐고 물으면 '외주 주면 된다'고 하더라. 실제로 구현한 게 아니라 이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로호 도입은 성과를 빨리 내라는 청와대의 독촉 때문이었다는 의심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청와대의 압력 같은 건 없었다. 전문가들이 과학기술부의 용역을 받아 연구를 했고 산업체 의견도 물은 결론이 '국제협력으로 가자'는 거였다. 2001년 2월부터 우주 선진국들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 나라를 갔나?

    "일본·인도·중국·프랑스 연구원을 돌았다. 각자 색깔이 있더라. 일본은 '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자들을 만나면 '우리끼리 얘기하는 건 오케이인데,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조금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소리만 했다. 중국은 심플했다. '우리는 아무 권한이 없다. 군(軍)과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인도는 '정부에서 OK만 하면 발사체는 공짜로도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프랑스도 번드르르한 수사만 늘어놓을 뿐 협력하겠다는 의사가 없었다."

    ◇사사건건 태클 건 미국… 우린 반미주의자

    ―미국은?

    "국무부에 두 번 갔다. 그냥 가면 안 만나줄 것 같아 우리의 두 번째 지구관측위성인 아리랑 2호 문제를 이유로 찾아갔다. 이걸 중국 창정(長征) 로켓으로 쏘아 올릴 계획이었다. 가장 싼 가격을 적어냈고 발사 실적도 좋았다. 그런데 미국이 '안 된다'고 했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경제 제재를 받는 국가'라는 것이다. 중국과 거래하면 미국산 위성 부품을 안 팔 것이라고 했다. 인도 로켓을 쓰는 것도 반대했다. '러시아 로켓 기술을 수입하려다 역시 제재를 받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에 대해서만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주로켓 개발을 도와달라고도 했나?

    "'우리도 계속 남의 로켓을 사서 쓸 수는 없다. 독자 개발 계획에 따라 파트너를 정하고 싶은데 너희가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은 한국이 우주로켓을 개발하는 것과 한국이 우주로켓 개발 능력을 갖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대로 개발할 수도 없는 건가?

    "우스갯소리지만 로켓 개발하는 사람들은 반미주의자 많다(웃음). 너무 막으니까. 미국이 외려 더하다 이거다. 우방이라는 사람들이. 물론 돈이 목적이지만 러시아는 '그래 한번 해보자'고 했다."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과 접촉하면서 러시아에 대해서는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러시아와 협력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확실하게 '예스(yes)'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중에 미국이 '우리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하면 우리는 뭐가 되나. 또 안 된다고 하면 이건 정말 바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확실한 사인을 주지 않았다. 기술 없는 나라의 비애는 이런 것이다."

    ―개발 과정에서 미국의 간섭은?

    "간섭은 없었다. 다만, 러시아에서 듣기로 미국이 '한국과 계약 내용 중에 혹시 기술이전 되는 건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2004년 10월 계약을 맺고 얼마 안 돼 (공동 개발 러시아 회사인) 흐루니체프 사장이 보자고 해 만났다. 그가 '(미사일로 전용하기 쉬운) 고체연료 로켓이 민감하다는 걸 너희도 알지 않느냐'며 '나로호 2단을 꼭 고체로 해야겠느냐'고 했다. 2단용으로 쓸 좋은 액체 로켓이 있으니 공짜로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너희가 다 해주면 우리가 하는 게 뭐냐. 만약에 2단 로켓 기술을 주면 받겠다. 2단은 엔진도 작은데 그것도 줄래?'라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없던 걸로 하자'고 하더라."

    ―미국을 의식한 제안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본다."

    조광래 단장은 지난 25년간 3개의 과학 로켓과 1개의 우주로켓을 개발했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 우주로켓이 될 한국형 발사체의 기반을 닦았 다. 그의 손을 거쳐 개발됐거나 개발이 진행 중인 로켓 축소 모형 앞에서 조 단장이 포즈를 취했다. / 대전=신현종 기자
    현대그룹의 위기 탈출구… 후일 나로호 개발에 도움

    ―러시아와 접촉은 언제부터 했나?

    "실은 2000년부터. 나로호 도입을 결정하기 2년 전이다."

    ―그땐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촉하기 전인데…

    "그걸 설명하려면 현대그룹 이야기를 해야 한다. 1992년 대선 때 정주영 회장이 출마해 YS와 격전을 치렀다. YS가 집권하면서 현대에 제재가 많이 들어가자 현대 사람들이 탈출구를 찾은 것이 우주산업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시베리아 자원 개발이니 이런 것을 막 밀어붙일 때여서 당시 현대는 모스크바에 탄탄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1993년 가을쯤부터 자기네들끼리 러시아와 접촉을 했던 모양이다. 우주로켓 개발이라는 테마로. 현대정공이 주축이 돼 전담 회사(현대우주항공)를 세우고 서산 간척지를 산업용지로 바꾸고 산업은행이 사업자금을 융자한다는 플랜까지 짰다고 한다. 그해 10월부터 우리 연구진들이 참여했다."

    ―기술도 배웠나?

    "현대 마북리 연구소 제일 위층을 급히 개조해서 숙소도 만들었다. 거기로 러시아 기술자 열댓 명씩을 불러와서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1995년 정부에서 '항우연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철수했다. 나중에 미국이 반대했다고 들었다. 훗날 현대우주항공이 해체하면서 거기 연구원들을 항우연에서 많이 채용했다. 그들이 나로호 개발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하룻밤 새 2억달러 깎았다

    ―94년의 일이 나로호와 무슨 관계인가"그때 만난 사람들이 2000년에 다리 역할을 했다. 처음 만난 곳은 '에네르고마쉬'라는 로켓엔진 회사였다. 소유스·제니트 같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로켓의 엔진을 만든 회사다. 러시아가 제작한 나로호 1단의 엔진도 이 회사 것이었다."

    ―어떤 형태의 협력을 논의했나?

    "에네르고마쉬는 1997년 로켓엔진 101개를 미국에 수출하는 계약을 했다. 우리는 그 사례를 내세우며 '우리도 엔진을 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엔진 기술이 없는 한국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술이전 이야기는 안 했나?

    "처음부터 엔진 기술은 이전할 수가 없다고 못을 박고 나왔다. 사실 우리도 미국과 접촉하면서 기술이전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90년대 인도와 러시아가 기술이전 협력을 추진하다가 미국한테 경제제재를 당했다는 것을 미국은 수차례 강조했다. 러시아는 '그걸 피하는 길은 공동 개발이라는 명분을 내거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다."

    ―나로호 1단 엔진은 러시아가 개발 중인 것이었다. 왜 검증된 엔진을 안썼나?

    "이미 개발이 완료돼 위성발사시장에 나와있는 다른 엔진을 쓴다면 공동개발이라는 명분을 내걸 수 있겠나."

    ―나로호 개발 대가가 2억1000만달러다. 러시아가 처음 요구한 가격은?

    "9억달러를 불렀다. (공동 개발 상대로 결정된 발사체 회사인) 흐루니체프는 당시 직원 월급을 못 줄 정도였다.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다음 날 '돈이 없다'고 했다. 하루 만에 7억달러가 됐다. 2억1000만 달러까지 가는 데 한 1년 걸렸다."

    ―러시아와 협력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우리는 밤새워 코피 터지면서 일정을 맞춰놓으면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내세우며 늑장을 부렸다. 발사장 건설도 1년 늦어졌다. 그러면서도 절대 '미안하다'는 소리는 안 한다. '미안하다'고 하면 ' 독박' 쓰는 게 러시아 문화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고집을 부렸으면 1차에서 성공했을 것

    ―가장 후회스러웠던 순간은?

    "1차 발사 실패 때였다. 위성 덮개 2개 중 하나가 방전을 일으켜 열리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방전이 생길 만한 곳은 모두 감싸는 조치를 했다. 딱 거기만 안 했다. 지상시험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한 번 더 살펴보고 이것도 해야 한다고 좀 더 고집을 부렸으면 성공했을 것이다. 심하게 자책했다."

    ―2차 실패 원인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양측이 만났다.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지상실험 증거를 제시했다. 흐루니체프 부사장은 반박 자료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지상과 고공은 다르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결국엔 양손으로 책상을 쾅 치고 일어나더니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안녕히 가쇼'하고는 일방적으로 나가버렸다."

    ―분노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입 전문가'라고 부르는 국내의 얼치기 전문가들 때문에 괴로웠다. 실패조사위원 중 한 명은 '너희는 실패했으니 입 다물고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고 했다. 로켓 관련 논문 한 편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아, 정말 대한민국에서 실패라는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 10년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감인대(堪忍待).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는 지난 25년간 딱 두 번 가족 휴가를 갔다고 한다. 외아들이 네 살 때 안면도로 2박3일, 그 아들이 고교 2학년이 됐을 때 제주도로 2박3일. "아빠는 놀 줄을 모른다"고 푸념하던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지금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키워드 |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北빈민층, 핵위협에 "어차피 죽을 거 전쟁하자"

    북한 당국이 연일 미국과 핵전쟁을 하겠다고 위협수위를 올리자 평양 주민 사이에서 “이러다 평양시가 잿더미가 되는 것 아니냐”는 ‘핵(核)공포증’이 확산하면서 외화..

      [키워드] 외화 사재기핵공포北도발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족신문
       
       
      주간베스트
        개인정보취급방침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대표전화 :010-6432-7771
      Copyright ⓒ 2007 인터넷 민족신문. All rights reserved.
      Contact baek43333@hanmail.ne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