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란 일본인이 미국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코가 오똑한 미남형의 그는 후쿠오카(福岡) 사무라이 집안 출신으로 청년 시절 메이지 정부의 첫 해외 유학생으로 뽑혀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같은 학과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란 학생이 있었고, 그는 졸업 후 23년 만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동창생을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넌 가네코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세련된 행동, 백인들의 마음에 쏙 드는 논리로 단번에 미국 여론을 휘어잡았다.
제임스 브래들리가 쓴 '임페리얼 크루즈'에 따르면, 그는 한 만찬 연설에서 "일본인은 피부는 황색이지만 마음과 정신은 미국인과 같은 흰색이며, 심장도 기독교도의 심장처럼 박동한다… 일본이 앵글로색슨 문명(미국과 영국을 지칭)의 숭고한 대의를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만일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앵글로 아메리칸의 문명은 결코 아시아에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아시아인 최초의 미국 로비스트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일본을 '미국 문명의 집행자'로 선전하여 루스벨트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백악관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가네코의 로비는 이듬해 7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간의 비밀 협약으로 이어졌다. 세계를 감쪽같이 속인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은, 훗날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미영일 3국동맹 위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상호 인정한 것으로, 한국민에게 모진 세월을 안겨주었다.
돌이켜 보면 이 밀약은 한 세기 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 전략의 파트너로 선택한 역사적 결정이었다. 두 나라 호전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이 구도는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밀약(1905) 체결 36년 후 미국은 그토록 믿었던 동맹국 일본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또 하나의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은 1941년 12월 8일 의회에서 "어제, 치욕의 날로 영원히 남을 이날, 미 합중국은 일본 제국 군대로부터 (진주만)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 학살행위를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70여년이 흐른 지금, 미국은 여전히 일본을 아시아 전략의 핵심 파트너로 삼고 있다.
최근 한일 갈등을 다루는 미국의 태도에서 한 세기 전 '가쓰라-태프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국은 동해 표기에서 '관행'을 이유로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사자로서 독도 갈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한일이 대화로 잘 해결하라"며 몸을 빼고 있다. 최근 아미티지-조지프 나이 '미일동맹 보고서'는 "한일 간의 민감한 역사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충고할 뿐 한국인의 역사적 상처에는 관심이 없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100년 전처럼 일본 일변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동진 앞에서 다시 '잘못된 밀약'의 기운이 꿈틀댄다. 미국이 그리는 큰 그림 속에 피로써 지켜온 한미동맹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21세기 아시아에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미국이 져야 할 '역사적 책무'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때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