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22 03:14
이달 특별전 갖는 영화배우 최은희, 파란만장 인생을 말하다
두번의 이혼·결혼, 납북…
남편 외도로 낳은 자녀 2명… 입양한 자녀 등 4남매 키워
한가족으로 의지하고 사는데… 그게 가장 기분좋은 일이야
'가장 긴 연기' 8년의 북한생활
김정일 생일파티 온 아이에… 이름이 뭐에요? 물었더니
와 묻나우? 버럭 소리질러… 나중에 보니 김정남이었지
그래도 내삶은 기적의 연속
종교의 자유 없는 북한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인생 빠르지만 아주 길어요
조심조심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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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연기 인생 70년을 맞은 배우 최은희(86)는 지난 17일 “인생은 화살처럼 빠르지만 한편으론 아주 길다. 나이 들어서도 살아 있는 건 감사하면서도 우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의 영화 중 스물다섯 편을 골라 이달 30일까지 열리는 최은희 특별전 ‘영화 같은 삶, 최은희를 돌아보다’를 통해 상영한다. / 김연정 객원기자
"인생을 오백년은 산 것 같다." 1931년 태어난 박완서 작가는 세상을 뜨기 전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겪은 세대의 회한이었다. 박완서보다 5년 먼저 태어난 배우 최은희(崔銀姬·86)는 삶을 돌아보며 "인생이 화살처럼 빠르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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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올해로 배우 인생 70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 태어난 최은희는 친구 손에 끌려 1943년 들어갔던 극단 '아랑'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6·25 전쟁 때는 군인에게 끌려가 인민군의 '경비대 협주단'과 국군의 '정훈공작대'에서 차례로 일했다. 그는 두 번의 결혼(촬영 기사 김학성, 영화감독 신상옥)과 두 번의 이혼, 납북(1978년), 역시 납북된 신상옥 감독과 재회(1983년), 극적인 탈출(1986년), 그리고 망명자로서의 미국 생활을 거쳐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서도 신 감독과 함께 입양한 남매와 신 감독과 내연녀(배우 오수미) 사이의 아이 두 명을 자녀로 두게 된 최은희의 삶 곳곳엔 현대사가 낸 상처가 수술 자국처럼 남아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최은희가 찍은 영화 가운데 스물다섯 편을 골라 이달 30일까지 최은희 특별전 '영화 같은 삶, 최은희를 돌아보다'를 연다. 작품은 최은희가 직접 선택했다. 서울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1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에선 2006년 세상을 뜬 신상옥 감독과 찍은 대표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성춘향' 등과 함께 최씨가 감독한 영화 '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이 상영된다.
배우 인생 70년과 회고전을 맞은 최은희를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지난 17일 만났다. 그는 "해방되기 2년 전부터 70년 동안 배우를 했다니… 창피하고 부끄럽고 그렇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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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춘향’ ‘상록수’ 등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리던 최은희의 1960년대 모습. /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제공
◇"나안 차암 바보처럼 살았군요"
―최 선생님은 세계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산 배우 아닐까요.
"그런가요, 하하. 내 인생 역정이 아름답지만은 않았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겪고 살았지마는… 희로애락이라는 게 이 세상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것 아니에요? 내가 배우니까 북(北)에도 끌려가고, 유독 더 겪은 건 있겠죠. 하지만 못 겪을 일을 겪었다고도 생각 안 해요."
―지금까지 회고전이 거의 없었죠?
"그렇게 됐네요. 신상옥 감독과 내 작품이 많이 겹쳐서인지 신상옥 특별전, 혹은 신상옥·최은희 특별전 이런 게 많았어요. 이번엔 특히 내가 감독한 작품('민며느리' '공주님의 짝사랑')이 올라서 각별해요. 지난 14일 '공주님의 짝사랑' 상영할 때는 몸이 좀 아팠는데도 억지로 가서 봤어요. 지금 보니까 내가 연출을 한 건지, 연극하는 걸 그냥 찍었는지 모르겠더라고, 하하."
―신상옥 감독님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죠?
"어휴, 내가 그게 제일 억울해. 사람들이 다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야. 내가 욕심이 많아서인지 남이 도와주는 건 달갑지 않아 했어요. (신상옥 감독을)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죠. 여자라고 남자들이 업수이 볼까 봐 로케이션(촬영 장소) 헌팅 다닐 때에도 산속으로 뛰어다니며 직접 찾고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또 여자가 너무 극성스럽다고 손가락질을 하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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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정말 화살처럼 빠르던가요?
"화살처럼 빠르지. 그런데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면 안 돼요. 난 초조해하다가 허리를 버렸어요. 신 감독 떠나고 나서 내 회고록 쓴답시고 너무 무리를 한 거예요. 갑자기 너무나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는 '서둘러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서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시까지 일을 했어요. 그전에 허리 수술을 해서 의사가 조심하라고 했는데 '이 나이에 더 뭐 볼 게 있나' 하고 무리한 거예요. 더 뭐 볼 게 없긴 뭐가 없어. 그 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느라 이렇게 고생하고 있잖아. 인생은 화살처럼 빠르지만, 한편으론 아주 길어요. 조심해서 살아야 해."
―아이들과는 어떻게 지내세요?
"나는 아이를 못 낳았지마는 지금 내 아이들이 사남매예요, 사남매. 신 감독과 입양한 두 명, 오수미와 신 감독 사이에 두 명. 신 감독, 오수미 둘 다 죽었고 결국 모두 내 아이들로 남았죠. 이제 증손주까지 해서 전 가족이 다 모이면 스무 명쯤 돼요. 오수미가 낳은 애들이 참 착하고 유순해요. 막내딸 승리는 연기를 하려고 애쓰다가 지금은 딸을 둘씩이나 낳고 가정생활을 잘하고 있죠. 요즘은 그게 제일 기분이 좋아, 하하. 내가 평생을 가정과 일을 왔다갔다하면서 살아서 그런지 승리는 (배우를) 안 했으면 싶더라고. 이 아이들은 모두 내가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건 우리 다섯이니까 이렇게 한 가족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 아니겠어요?"
―삶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뭘 바꾸고 싶으세요.
"생각하나 마나 한 걸 뭣하러 해요. 되돌려지지도 않는 걸 뭐하러 생각하느냐고, 하하."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난 장기기증 홍보대사잖아요. 그게 우리 어머니가 어린 시절 해주던 말씀 때문에 하게 된 거거든요. 아주 어릴 때였나 봐요.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해. 무서워'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엄마가 이렇게 답하더라고. '죽는 거 아무것도 아니란다. 죽으면 다 부패해서 없어지는 거란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건강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커서 보니까 그 말씀이 옳더라고요. 죽고 난 다음에 몸을 아낄 거 뭐 있어요?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세요.
"나는 이제 말년에 접어드는 입장이니까 죽음 자체를 어떻게 아름답게 장식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많죠. 못다 한 일도 생각나고, 옛일을 바로잡고 하자니 때는 늦었고…. 나이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는 게 이런 고민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좀 약한 사람은 치매도 걸리고 하겠죠. 요즘 컨디션이 좀 낳아졌지만 나도 신 감독 죽고 형편없었어요. 늙어서도 살아있다는 건 감사하면서도 우울한 일이지…."
최은희는 말을 멈추고 "이야기를 오래 하면 목이 잠긴다"라며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늘 쓰고 다니는 옅은 선글라스 탓에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노래를 참 좋아해요. 김도향씨가 잘 불렀는데…." 노(老)배우가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안 차암 바보처럼 살았군요, 나안 차암 바보처럼 살았군요…." 그는 말했다. "난 진짜 평생 바보처럼 살았어요. 최은희라는 사람은 무지하고 어수룩하게 살았다고, 그렇게 기억되겠죠?"
―혹시 누군가 '삶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하! 삶은? 거창하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내 학식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겠지. 손주가 물으면 이렇게 답해줄 거예요. '인간이란 태어났으니까 먹고 입고 숨 쉬고 사는 거다. 그게 삶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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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2월 미국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주한미군 위문공연을 하러 한국을 찾았을 때 최은희가 대구공항에서 만나 웃는 모습. / 조선일보DB
◇"평생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어요"
최은희는 신 감독과 1966년 세운 안양영화예술학교(현재 안양예고)가 어려움을 겪자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1978년 홍콩을 찾았다가 납북됐다. 홍콩에서 배를 타고 8일 만에 북한 남포항에 도착했을 땐 김정일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정일은 "내레 김정일입네다"라고 첫 인사를 했다. 며칠 후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는 "최 선생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습네까?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네까?"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최은희와 친분을 쌓으려 애썼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은 이후 신상옥 감독도 납북했고, 두 사람에게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
―월북한 연극인들이 북한에 꽤 있었죠?
"황철, 김연실, 문예봉같이 함께 연극하던 선배들이 북한에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여러 번 '연극하던 선배들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김정일에게 그랬거든요. 기회가 있으면 만나게 해준다고 계속 미루더니 결국 6년이 지나서 상봉 모임이라고 연회를 해줍디다."
―수십 년 만에, 그것도 북한에서 만났을 땐 어땠나요.
"나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선배들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어요. 내가 북한에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연회장에 온 거야. 그런데도 나에게 '어쩌다 여기 왔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우리는 잘 지낸다. 너도 잘 지내지?' '네, 저도 잘 지내요' 같은 형식적인 이야기만 오갔죠. 거대한 홀에 모여서 집단으로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허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북한 사람들)은. 나도 북한에 있은 8년 동안 내 평생 가장 긴 연기를 하며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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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은희와 남편이었던 영화감독 신상옥의 납북을 확인한 1984년 4월 2일 조선일보 호외. 2 신상옥과 최은희가 1989년 6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김정일의 지령에 의해 강제 납치됐다”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김정일과 여러 번 만났죠. 김정은 얘기는 없던가요.
"전혀 없었어요.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은 한 번 딱 봤어요. 김정일이 생일에 초대해서 간 적이 있는데 요만한 아이가 있더라고. 지금은 살이 많이 쪘지마는 어렸을 때 김정남은 할아버지(김일성) 모습을 많이 닮았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많이 닮았네?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그랬더니 버럭 소리를 치데요. '와(왜) 남의 이름을 묻나우?' 하고. 당신이 뭔데 나를 어린애 다루듯 하냐 이거야. 그러니까 김정일이 '얘, 정남아. 어른이 물으면 아무개다라고 답해야 한다'라고 말해서 그 아이가 김정남인 줄 알았죠."
―'최은희는 납북이 아니라 월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말 같지 않아요. 가르칠 필요도 없어요. 비슷한 구석이 있는 얘기라야지 대꾸를 하지. 안 그래도 북한에 납치되고 나서 일주일인가 지나서 무슨 부부장(차관급)이라는 사람이 라디오 방송을 좀 해달라고 그래요. 선전 방송이죠. 내가 자진 월북했다고 말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소리를 질렀어요. 말 같지 않은 말 하지 말라고. 당신들이 나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빨리 보내달라고, 악을 썼다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너무 힘들고 아찔하고 속상한데… 나한테 아직도 월북을 했다고 하지, 사람들이."
◇"죽으면 끝… 용서하고 말 게 뭐 있어?"
최은희는 울컥한지 잠시 숨을 골랐다. 나쁜 루머는 또 있었다. '6·25 때 군인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거의 대응을 하지 않다가 2007년 낸 회고록 '최은희의 고백'에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었다. 집단 성폭행 이야기는 사실무근이고, 그를 전쟁 때 건드린 사람은 국군 헌병대장이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머리엔 총부리가 닿아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왜 오래도록 잘못된 소문에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으셨어요?
"누구한테 반박을 해요, 누구한테. 소문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인간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남의 일은 자기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추측하고 마음대로 얘기하는 것들이 인간이더라고요.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해요?"
―(성폭행한) 국군 헌병 대장을 나중에 마주치거나 한 적은 없나요?
"어휴, 창피해요. 얘기도 하지 마요."
그의 상처를 자꾸 헤집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오수미'의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배우였던 오수미는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와 결혼 생활을 할 때 만난 내연녀였다. 신 감독은 오수미와 두 아이를 낳았다. 이 일로 최은희는 신 감독과 이혼한다. 오수미는 후일 사진작가 김중만과 결혼했다가 갈라섰고 미국 하와이에서 1992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최은희는 때때로 오수미가 낳은 아이들을 보살폈다. 지금도 그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이제 오수미씨는 용서가 되셨느냐"고 묻자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오수미가, 왜? 죽었잖아요."
―죽음 뒤엔 미움도 사라지나 봐요.
"죽으면 모두 끝인 걸, 뭐. 그런데 용서하고 말 게 뭐 있어? 한때는 괘씸하고 서운하고 그랬죠. 내가 대선배인데, 너무 무시당한 것 같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걔도 하나의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는 생각…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회고록에는 '절대자가 있으면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시련에 빠트리는지'라고 썼죠.
"한때 그랬죠. 북한에 끌려갔을 때 특히 그랬어요. '하느님, 수많은 배우가 있는데 왜 하필 나한테 이런 고초를 겪게 하나요!' 원망을 했다고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많은 시련을 겪고 이렇게 꼿꼿하게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
최은희는 북한에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납북된 중국계 마카오 여성을 통해서였다. 그는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에서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기적이다. 되돌아보면 삶은 이런 기적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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